“총명한 사람에게는 괴이하게 생각되는 것이 없으나 무식한 사람에게는 의심스러운 것이 많다.”
연암 박지원의 이 문장은 단지 옛 성현의 고루한 훈계로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시대를 초월한 인식론의 문턱에, 우리를 조용히 앉혀놓는다. 나는 이 문장을 읽고 나서야 이해했다. 왜 어떤 사람은 세상을 단순하게 보면서도 깊이 이해하고, 어떤 사람은 무한히 의심하면서도 여전히 모르는가를.
괴이함은 무지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그 괴이함은 세계가 낯설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세계를 받아들일 틀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견문이 적으면 괴이하게 여김이 많고, 이는 곧 세계를 해석할 수 있는 개념적 언어가 우리 안에 부족하다는 말이다.
반면, 연암이 말하는 총명한 사람은 모든 것을 경험한 사람이 아니라, 경험하지 않은 것을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는 열 가지를 보면 백 가지를 떠올리고, 거기서 천 가지의 괴이한 것과 만 가지의 신기한 것들을 ‘객관적으로’ 마주하려 한다.
나는 이 ‘객관적’이라는 단어에서 멈췄다. 우리가 아는 객관성이란 종종 감정을 배제한 분석의 태도였지만, 연암에게 있어 그것은 자기 내부의 주관을 자각하고 그 위를 걷는 행위였다. 즉, 마음의 여유 속에서 생겨난다. 긴장된 의심이 아니라, 열린 사유로서의 객관.
그는 말했다. “본질에 충실하여 객관적으로 보려하되, 주관을 섞지 않는다.”
나는 여기서 ‘섞지 않는다’는 말이 완전한 배제라기보다는, 자기의 편견이 관찰을 흐리지 않도록 ‘놓아두는 태도’라고 해석한다.
우리가 세계를 너무 빨리 판단하지 않고, 충분히 머물러 보기만 해도 — 총명함은 시작된다. 그리고 그 총명함은, 우리가 무수히 ‘괴이하게 여겼던’ 현상을, 조용히 풀어낸다.
총명한 사람은 결국, 더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더 넓게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