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갑진내란 후 1년
판도라의 상자
지난 일 년간은 매우 힘든 시간이었다. 왜냐하면 마치 판도라의 상자라도 열린 듯 세상의 온갖 추악한 것들이 기어 나와 준동하는 것을 안 본 눈 사고 싶을 정도로 하루도 빠지지 않고 목도해야만 하는 시간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숨어 지내왔던 인간의 탈을 쓰고 있었으나 짐승보다 못한 악귀들이 도처에서 모습을 드러내고 세상을 어지럽혔다. 뒤돌아 보면 이 모든 것이 시작된 일 년 전 갑진년 12월 밤은 단지 그 상자를 깨뜨려 버린 한 악귀에 의해서가 아니라 오래도록 썩어왔던 상자가 마침내 허물어져버려 그 안에 담겨있던 가득한 것들이 악취를 드러낸 것에 불과했다. 그 악취가 얼마나 역했는지 토할 것 같이 어지러워 이 세상에 더 이상 기대할 것이라고는 없다고 생각에 침울했다. 인간에 대한 모든 신뢰를 잃었고 모든 것이 인간의 탈을 쓴 좀비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만약 신이 이러한 세상에 심판에 대하여 의견을 조금이라도 구한다면, 스스럼없이 이 더러움으로 끝없이 오염된 인간계를 멸하여 달라고 부탁할 만큼 세상은 사악함과 부조리, 그러면서도 뻔뻔함이 촘촘히 틀을 잡아 어디서부터 고쳐나가야 할지 앞이 점점 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늑대와 여우
그러한 불신과 악취의 중심에는 인간이 자랑스럽게 이룩한 '법'이 존재한다. 흡사 신도 잘못하면 못 박을 만큼 공정하다고 자랑해 왔던 이 법은 알고 보니 사실 인간의 가장 추악한 단면으로 악용되고 있었다. 그것은 누구에게 들이대느냐에 따라 솜털이 되기도 하고 칼이 되기도 하여 그동안 쌓아온 가치와 유산을 모두 허무맹랑하고 우습게 만든다. '지록위마'가 설마 법정에서도 널리 이롭게 하여 판결하는 이의 마음에 따라 사슴을 말로 판정하고 말도 사슴으로 뒤 바꾸는 법정이 부지기수라니? 그렇게 썩어 빠진 기둥에 기대어 이 세상을 지탱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더군다나 법을 휘두르는 칼을 지닌 자들은 이 보다 더해 '나뿐 놈들의 전성시대'에 나오는 조폭은 오히려 낭만 있고 우아해 보일만큼 양아치였음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었다. 이들은 사슴을 말 정도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양을 늑대로 뒤집어 씌우고 늑대를 양으로 둔갑시킬 수 있는 꼬리 아홉 달린 가짜 양치기 여우 목동이었다. 늑대와 여우가 짬짜미 한편으로 가장한 목동이었다니 양들은 오죽했었을까? 그러나 늑대인간임이 드러났음에도 발톱과 이빨을 드러내고 피를 뚝뚝 흘리는 주둥이를 벌리며, 양을 잡아먹은 늑대가 아니라, 목동으로 둔갑한 꼬리 아홉 구미호가 아니라, 그저 순수한 양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대목에서는 분노마저 치밀었다. 이들이야 말로 검은양으로 위장해 신을 못 박을 검은 악마였을지도 모른다.
무뢰배의 전성시대
이 기간 동안 세상의 무뢰배란 무뢰배는 거의 다 구경을 한 듯도 싶다. 이러한 무뢰배들이 감투란 감투는 다 차지하고 그 밑에서 일하는 기분은 과연 어떠할까? 가장 처참하기 짝이 없는 수준 이하의 말종 인간들이 지배하는 세상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데 그것이 현실이라면 지옥이나 마찬가지다. 매국친일파가 독립기념관에 앉아 애국지사의 유산을 찢어발겨 고문하고, 가장 부패하고 추악한 자가 감사원과 감독원의 의자에 누워서 부패한 자들을 잘 봐주고 부패에 따르지 않은 자들을 심문하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몰아넣는다. 귀가 있다면 누구나 바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가지고도 네 귀가 잘못 들었다면서 방송과 언론을 통해 귀와 입이 바른 자들의 눈을 멍들이고 입을 꿰매고, 귀를 잘라 탄압한다. 상을 받아야 할 사람에게 벌을 내리고 벌을 받아야 할 사람도 아닌 것들에게 상을 수여하는 조롱식을 거행하며, 바보 같이 모른 척했거나 사악했음을 칭찬하고 격려한다. 나라의 눈먼 재산을 가장 부끄러움 없는 아첨꾼들에게 자자손손 대대로 편히 살고 떵떵거릴 수 있도록 아낌없이 나누어 준다. 이것이야 말로 사악한 뱀들과 그 사촌 도마뱀들의 전성시대가 아니던가? 무뢰배들의 역겨움에 신물이 나와 견딜 수가 없다. 그러한 자들 밑에서 일하는 자괴감과 상실감은 과연 어떠했을까?
아군인가 적군인가?
처참하기 그지없는 장성들의 생각과 행동에는 군대 같은 것은 절대 가지 말아야 할 곳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안 그래도 노예제나 다름없는 군생활을 한 것도 억울한데 저런 처참한 자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킨다는 것은 더 이상 설득의 명분이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북한과 휴전 한 이후 군인이 적군과 싸웠던 적이 있었던가? 그들은 항상 그 대신 국민을 향해 총을 겨누어 왔다. 심지어는 북한군이라고 뒤집어 씌우기도 한 것 같다. 이제 군복을 보면 언제나 반란을 일으킬 꿈을 꾸는 자들로 보여 오히려 격멸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미국 같으면 군인은 존경의 의미로 예우한다지만, 반란의 후예이자 언제나 반란의 선봉에 설 자들을 어떻게 다시 믿고 신뢰할 수 있을까? 서울 한복판에 요지를 차지하고 있는 군사시설은 다 내려보내야 한다. 반란이나 일으키는 자들의 전초기지이기 때문이다. 사병을 사적 노예 정도로나 인식하는 처참한 인식의 수준에 고작 그런 자들을 믿고 자식을 맡길 부모들이 불쌍해 보인다.
신의 배신자
신을 배신한 신의 이름을 참칭 하는 배신의 배신자들의 출현은 더욱 세상을 절망스럽게 한다. 이 땅은 알고 보니 몇몇 사이비 교주의 나라였던 모양이다. 과연 신은 이들에게 당장 벼락을 선물하지 않고 뭐 하고 있는 것일까? 문제는 사이비 이단과 그렇지 않음이 더 이상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동종업계라서 그런지 어떠한 비판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한통속이었나 보다. 아니다 한 통속 정도가 아니었다. 그들이야 말로 알고 보니 이 기득권의 가장 선봉에선 사악한 뱀들의 무리가 아니었던가? 뱀이 신을 참칭하고 있으니 거기에 목이 감긴 신이 참 딱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신의 신성함은 땅에 떨어지다 못해 바닥에 굴러 시궁창에 빠지고 있으며 무뢰배 교주들이 이러한 신을 발로 차며 아주 우습게 가지고 놀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전혀 응답하지 않는 신과, 신의 대리인을 자처하는 입을 꾹 닫고 있는 자들은 자기만족적 권력과 콩고물에 눈이 멀어 아무도 신의 체면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오히려 그 우두머리에는 신을 팔아 돈을 벌어 크게 떠드는 자들의 놀이터가 되고 말았다. 그래서 신의 이름을 내건 집단은 이제 가장 거대하고도 사악한 알파와 오메가임을 자처한다. 더러운 부패에 먼저 알파가 되고 그것을 덮는 오메가의 역할이 교리가 된다. 어차피 싸구려 신의 이름으로 스스로의 죄를 셀프 사면하면 될 것. 신이 있다면 이들을 직무유기의 죄를 물어 가장 먼저 멸하여야 할 것이다.
혐오와 비겁함
눈을 씻고 봐도 존경할 만한 어른 한 명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젊은이들은 자포자기의 조롱과 혐오에 빠져 있는 듯하다. 보고 배울 게 없는, 아니 악한 것을 먼저 실감한 세상에서 정의롭기보다는 비겁함을 선택하고 잘못 튀었다가는 정 맞는 돌이 되거나 집단 따돌림을 당한 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몸으로 체득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력과 이권에 아주 순응적이고 자신보다 약한 자들에게는 다구리를 서슴지 않는다. 세상은 냉혹한 약육강식, 먹이사슬의 관계라는 것을 어릴 적부터 배워서 그런지 희망은 버리고 기회주의적 한탕을 탐한다. 타인의 고통에 둔감하고 자신의 고통에는 소스라치리 만큼 민감하다. 겪어 보지도 않았는데 유전적으로 꼰대보다 더욱 꼰대스럽다. 과연 존경할 수 없는 어른의 잘못일까? 자연스러운 젊은이로의 자연선택적 본능일까?
조폭은 낭만이라도 있었지
세상을 너무 부정적으로만 본다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옛날에는 조폭 두목이나 심지어 반란을 일으킨 적장도 일이 틀어져 실패하면 "거 참 죽기 좋은 날이네"라고 멋쩍은 말을 남기고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던지고 부하라도 당부하는 낭만이라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 우두머리에 있는 자들은 너무나도 찌질하여 도저히 봐줄 수가 없는 지경이니 그 밑에서 딱까리를 하였던 무뢰배들은 얼마나 더 못한 지 말할 필요도 없는 상황이다. 더군다나 그런 자들이 다시 모인 무뢰배들에게 판결을 맡기고, 정의를 되찾게 하고, 국가의 안녕을 맡긴다는 것은 정말 자괴감이 드는 일일 수밖에 없다. 그러한 세상을 보고 자란 젊은이들에게 무엇을 기대한 다는 것도 다 부질없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그 반대로 행동해야 잘 나가고, 부자가 되고, 떵떵거릴 수 있다는 사실에 깊은 회의감을 느끼지 않을 자 누가 있으랴!
삼분의 일이 좀비
과연 치유는 가능할 수 있을까? 어디까지 썩어 들어가 있는지 가늠도 되지 않아 이 수술은 분명 팔 하나와 다리 반 정도는 눈을 찔끔 감고 잘라내야 생존이 가능할 듯 보인다. 망상을 일삼는 눈 한쪽은 뽑아내야 할 듯하고, 거짓말을 일삼는 혀 삼분의 일 정도는 잘라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면 이 신체는 결국 피를 많이 흘리거나 불구가 되어 생존하기 힘들 수도 있다. 그렇다고 거의 좀비에 가까워 악취가 진동하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기만하는 이 몸을 이대로 가만둘 수 있겠는가? 더욱더 썩은 부위는 커질 수 있는데, 차라리 죽을 때 죽더라도 존엄하게 죽기 위하여 썩은 부위를 확 도려내거나 불로 지지는 편이 낫지 않을까? 아니 너무 고통스러울 것 같다. 그냥 아예 신에게 모든 것을 접고 멸하게 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이 나을지 모른다.
지난 일 년은 전혀 자랑스럽지 않았다
지난 일 년은 아주 조금 나아질 기미가 보이고 아주 천천히 무언가가 해결해 가는 모습이 보이면서도, 결코 자랑스럽지 않았다. 그보다는 세상의 더러움의 색깔이 더욱 선명해지는 시간이었으며, 어찌할 수 없는 좀비 무뢰배의 소음이 더욱 커지는 시기였다. 알고 보니 참으로 참담한 일 가득이었으며 기득권의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더러움의 몸부림으로 인해 악취가 삼천리에 걸쳐 내내 진동했다. 이 세상은 이미 신뢰를 잃었다. 무법천지, 내로남불, 내법남불법(내가하면법 남이하면불법), 한마디로 여전히 난중(亂中)이 지속되고 있었다.
난중일기
그래서 문득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가 떠올랐다. 임진왜란의 난중(亂中)이 이러했을까? 오히려 이보다 더했을까? 오히려 왜구라는 외적과 싸우고 백성은 똘똘 뭉쳤으니 이보다는 나았을까? 아니 그 난중(亂中)에 이순신을 역적으로 모함해서 백의종군하게 하였으니 이 보다 더했을까? 선조라는 무능과 비겁의 왕은 도망가고 원균과 같은 이들이 득세하기도 했으니 이 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았을 것도 같다. 그때 이순신 장군은 이 모든 심경을 난중일기로 기록했다. 정확히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임진년 임진일기부터, 계사일기, 갑오일기, 을미일기, 병신일기, 정유일기, 무술일기, 총 일곱 권의 7년간의 기록인데 난(亂)을 겪은 고뇌가 고스란히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그도 한순간은 모든 것을 때려치우고 싶을 것이었다. 선조의 비겁함, 조정에서 모략을 일삼은 판결하는 무뢰배들, 심지어 무뢰배 중의 무뢰배 왜놈들까지라니. 백성들은 있어 봤자 미약했고, 원균 같은 놈들이 요직에 올라 그를 조롱하기를 즐겨했을 것이다. 그의 자괴감과 상실감은 누구보다 더 했을 것이다. 그가 겪은 난(亂)은 대비하고 준비할 수 있었지만 결코 막을 수는 없는 현실이었다. 그런 난중(亂中)에 그는 겨우 일기라는 형식을 통해 마음을 다잡고, 기약할 수 없는 내일, 하루하루를 근근이 버텨낼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의 기록은 그에 결코 비할바는 아니지만 그러한 난중일기 같은 것이다. 절체절명의 왜란을 겪고도 현재 이 나라가 이렇게 살아남아 있을 수 있음은 그 모든 악취와 무뢰배 속 희망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것은 어떠한 배나 칼, 화살, 총포보다 강한 내면의 화신이었다고 여겨진다. 이 땅은 과연 가득히 뿌려진 방사선 낙진을 극복하고 오염과 악취에서 치료될 수 있을까? 작년 갑진일기 보다 오늘 을사일기는 더욱 나아졌는가? 내년 이맘때쯤 병오일기에는 이 난(亂)이 과연 끝났다고 쓸 수 있을까? 안타깝게 계속되고 있다고 기록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