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환은 침음을 삼키며 그 자리에서 굳었다. 떨리는 손으로 빈 소주병을 들어 술을 먹는 시늉을 했다. 나는 너를 본 적이 없으니 안심하라는 연기였다. 그리고 몸을 돌려 방으로 걸어갔다. 윤수의 시선이 느껴졌다.
안방으로 들어간 뒤 재빨리 문을 닫고, 거친 호흡을 했다. 덜컥 숨이 막힌다는 게 무엇인지 실감했다. 불현듯 현관문을 제대로 잠갔는지 불안했다. 안방 문을 잠근 뒤 커튼을 치고, 창문도 잠가져 있는지 확인을 했다. 그리고 침대 위에 누워 이불을 뒤집어썼다. 방금 내가 본 게 윤수가 맞는지 헷갈릴 정도로 공포감이 컸다. 그렇다고 불을 켜기도 두려웠다. 마치 감시를 당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민환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
민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샤워를 했다. 대충 빵과 주스로 아침을 먹고는 성문의 집으로 향했다. 성문이 오늘 대학병원에 가서 채연서를 찾을 동안 윤수를 봐주기로 한 날이었다.
민환이 초인종을 누르자 문이 열었다. 성문은 이미 나갈 채비를 마친 상태였다.
“윤수는?”
“자고 있어.”
“지금까지 한 번도 안 깬 거야?”
“응.”
민환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제 술에 취해 잘못 본 건가 싶었다. 성문이 겉옷을 입고 신발을 신으며 입을 뗐다.
“다녀올게. 반찬이랑 찌개 해놨으니까, 아침 안 먹었으면 먹어.”
“윤수는 안 깨워도 돼?”
“그냥, 놔둬. 알아서 일어나겠지.”
“알겠어.”
성문이 문을 열고 나갔다. 민환은 고개를 들어 다락방 위를 올려다봤다. 윤수가 보이지 않자 계단 위로 올라갔다. 민환은 자고 있는 윤수를 바라봤다. 다락방 위로 올라가 조심히 윤수가 덮고 있는 이불을 들췄다. 민환은 깜짝 놀랐다. 새벽에 윤수가 입고 있었던 옷 그대로였다.
그리고 눈을 번쩍 뜬 채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윤수.
민환은 움찔거리며 이불을 놓쳤다. 다시 보니 자고 있었다. 민환은 거실로 내려가 커피를 탔다. 식탁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새벽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어제 그 느티나무 아래서 무얼 했던 걸까? 왜 나를 노려봤던 걸까.
민환은 윤수가 깨어나면 물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지 않아도 린에 대해 묻고 싶었던 게 많았는데 잘됐다 싶었다. 하지만, 1시간이 흘러도, 2시간이 흘러도, 정오가 돼도, 오후가 돼도 윤수는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민환은 결국 다시 다락방 위로 올라갔다. 윤수는 여전히 자고 있었다. 민환이 이상하다 생각하며 거실로 내려가려 할 때였다.
“왜요 선생님.”
윤수가 말했다.
“..어? 깨어 있었니?”
“네, 아까부터요.”
윤수는 두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배 안 고파? 아무것도 안 먹었잖아.”
“괜찮아요. 요 며칠 전부터 배가 고픈 적은 없거든요.”
“선생님이랑 잠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린에 대해 물어보시려는 거죠?”
“맞아. 사실 성문이 한테 들었거든. 린이 이상한 능력을 사용한다고...”
“거짓말.”
“응?”
“선생님이 궁금한 건 그게 아니잖아요.”
윤수가 눈을 뜨고 민환을 쳐다봤다.
“린이 선생님 아내를 죽였는지 그게 궁금한 거 아니에요?”
“.....”
민환은 윤수의 눈을 피했다. 마치 속을 다 들킨 느낌이었다.
“아버지한테 어디까지 들으셨어요?”
“린이 연서를 성폭행했던 마을 남자들을 다 실족사시켰다는 거랑... 자기 엄마를 죽였다는 거...”
민환은 저도 모르게 그대로 실토했다.
“맞아요.”
“린이 정말로 초능력을 쓴다는 거야?”
“네, 그 능력으로 선생님 아내까지 죽였는걸요.”
“뭐...?”
민환은 충격을 받았다.
“린한테 사과하세요.”
“...사과?”
“린이 선생님 아내를 죽이게 만든 거요. 그 아이는 그런 아이가 아닌데, 선생님이 그렇게 만든 거예요.”
민환은 혼란스러웠다. 동시에 감정의 소용돌이가 쳤다. 그런데 이 감정이 무엇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린에 대한 분노? 아내를 잃은 슬픔? 이제는 아무도 살아있지 않다는 허무? 민환은 가까스로 이성의 끈을 놓지 않으며 물었다.
“그럼 성태와 상태도 린이 죽인 거니?”
“상태는 죄책감에 스스로 뛰어든 거예요.”
“성태는? 성문이 말로는 상태가, 누가 자기 형을 낭떠러지로 밀었다고 하더구나.”
“......”
“그것도 린의 짓이라는 거니? 린은 실종 상태였는데?”
“뭐가 더 궁금하신 거예요? 어차피 죽을 애들이 죽은 건데 안타까우신 거예요? 설마 걔네들을 동정하고 계신 건 아니죠?”
민환은 말문이 막혔다. 아이들에게 무관심 해 벌어진 일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가 가르치던 학생이 죽었는데 나 몰라라 할 수도 없었다.
“선생님 때문에 너희들의 관계가 더 안 좋아졌다는 건 인정한다. 그래도 학생이 죽었는데, 사유는 알아야 하지 않겠니?”
“대단하시네요. 이제야 관심을 갖는 게.”
민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윤수가 이불을 걷고 거실 아래로 내려왔다. 민환은 그때 윤수의 시커먼 발바닥을 보았다.
“선생님은 그냥 그대로 있으시면 돼요.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상관없다는 듯이.”
민환은 가만히 윤수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식사하셨어요? 갑자기 배고프네.”
윤수는 주방으로 가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져 있는 국을 데웠다. 수저를 들고는 밥솥 뚜껑을 열었다. 고개를 숙인 채 천천히 입을 뗐다.
“다시 말해줘.. 선생님 아내가 정말 린에게 죽은 거니?”
“네.”
“왜...? 왜 린이 우리 아내를 죽인 거야?”
민환은 어느새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정말 모르셔서 물어보는 거예요?”
윤수가 고개를 절레절레거린 후 입을 뗐다.
“린이 저를 좋아했으니까요.”
“뭐...?”
“선생님은 린 아줌마가 고통받을 때, 도망가셨죠? 린은 그러지 않았을 뿐이에요. 오히려 제가 당한 걸 복수해 줬죠.”
민환은 교실에서 벌어졌던 장면을 떠올렸다. 윤수에게 엎드리라 말했지만, 말을 듣지 않았고 그래서 뺨을 때렸다. 그날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른다. 윤수 말대로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성문이에게 가졌던 원한을 윤수에게 푼 것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널 때려서 린이 그런 일을 벌였다는 거니?”
민환이 메마른 입으로 묻자, 윤수가 대답했다.
“네, 박중구 아저씨한테 강간까지 당했죠.”
“뭐?”
윤수가 국이 담긴 냄비를 들더니 통째로 밥솥에 부었다. 그리고는 숟가락으로 게걸스럽게 퍼먹기 시작했다. 민환의 음성이 높아졌다.
“무슨 말이야? 우리 아내가 박중구한테 강간을 당했다니?”
윤수는 아무 말 없이 없었다, 입 안 가득 밥이 있는데도 손을 멈추지 않고 계속 입밥을 쑤셔 넣었다.
“지윤수! 말해보라니까!”
“시발!”
윤수가 숟가락을 바닥에 내던졌다.
“니 아내가 강간당한 걸 왜 나한테 그래? 그러게 누가 날 때리래? 네가 때리지만 않았어도 채린이는 죽지 않았어. 알아?”
민환은 말을 잇지 못했다. 윤수의 언행도 충격이었지만, 아내가 박중구에게 강간을 당했단 이야기를 믿을 수가 없었다. 성문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성문이한테... 아니, 중구한테 가봐야겠어... 중구가 설마 그럴 리가...”
민환은 반쯤 정신을 놓으며 신발장 앞으로 걸어갔다. 중구가 있는 교도소로 갈 생각이었다. 신발을 신고는 현관문을 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윤수는 다시 숟가락을 들고 밥을 퍼먹었다.
***
용언 폭포가 거센 물살을 갈랐다. 구형석은 절벽 위에 서서 폭포를 내려다봤다. 폭호에는 물 회오리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구형석이 알기론 폭포는 단 한 번도 물줄기가 마른 적이 없었다. 그 덕분에 마을은 몇십 년 동안 가뭄이 온 적 없었다.
그러다 보니 궁금했다. 만약 가뭄으로 인해 물이 마른다면 저 아래에 무엇이 있을지. 아마도 폭포에 빠진 사람들의 시체가 잔뜩 잠겨 있지 않을까. 물 회오리 속에서 손을 들고 다음 사람이 빠지기를 기다리지 않을까. 상태도 그렇게 발목을 붙잡혀 익사한 뒤 둥둥 떠오른 게 아닐까.
구형석은 멍하니 폭포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 뒤로 풀숲이 작게 흔들렸다. 이내 터벅터벅 발소리가 들렸다.
“행님아.”
기찬이었다.
“왔나.”
구형석은 여전히 절벽 끝에서 폭호를 내려다봤다.
“행님아 거기서 뭐 하노. 위험하잖아.”
“상태 여기서 떨어진 거 아나?”
“응... 들었다.”
“상태가 이까지 제 발로 걸어올 거 같나.”
“아니. 걔 겁 많잖아. 그 앞은커녕 근처도 못 간다, 아이가.”
“근데 와 떨어졌을까?”
“우리 아버지가 그러는데 윤수랑 같이 있었다 카더라.”
“윤수랑? 와?”
구형석이 이윽고 기찬을 쳐다봤다.
“내도 모르겠다.”
기찬은 고개를 절레절레거렸다.
“니 아버지한테 혼났다매. 괜찮나?”
“괜찮다. 그런데...”
기찬이 말하기를 주저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오늘 윤수 집에 가서 괴롭힌 거 사과하고 오라 카라 했다.”
“그래서 나보고 나오라 한 기가?”
“응... 행님아 같이 가자. 나 무섭다. 이러다 우리도 죽는 거 아이가...”
기찬이 우는 소리를 해대자 형석의 눈빛이 바뀌었다.
“죽어? 누가? 내가?”
“행님... 어제 여기서 굿했던 무당 린네 집에서 죽었다 카더라... 마을에 귀신이 있다는 얘기도 있꼬...”
“말 같잖은 소리 마라! 귀신이 어딨노? 됐고 사과는 마 혼자 해라! 그리고 앞으로 이런 씨잘데기 없는 소리 할 끄면 불러내지도 마라. 알았나?”
“행님아...”
형석은 몸을 홱 돌려 기찬을 지나쳤다. 기찬은 그를 설득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하는 수 없이 혼자 윤수내로 가기로 했다.
그렇게 약 스무 걸음쯤 걸었을까?
“아악!”
느닷없이 뒤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기찬은 걸음을 멈추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