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건 선생과 오랜 시간 메시지를 주고받으면서 저는 그녀를 상상했답니다. 남자 혐오가 있지만 활기찬 그녀는 건강미가 넘치는 구릿빛 피부를 하고 있을 테고, 헤어스타일은 생머리보다 단발머리가 어울릴 겁니다. 가끔 반묶음으로 사과머리를 해 귀여움을 강조할 때도 있고, 입술은 두툼한 편이며 오른쪽 눈 밑에는 매력점이 있습니다. 키는 162cm. 날씬한 체형으로 아담해, 멀리서 보면 귀엽지만 가까이에서는 시크하고 도시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죠. 경계심이 많아 보통 남자들은 그녀에게 쉽게 다가서지 못할 겁니다.
이게 제가 상상한 그녀의 외관입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매력적이었습니다. 특히 전 그녀처럼 길들여진 동물보다 길들어야 하는 동물을 선호하거든요.
그런데 그녀는 제게 충격적인 사진을 보여줬습니다.
새침하고 도도해야 할 그녀가 파괴되어 있었죠. 눈두덩이는 시퍼렇게 멍들었고, 입술은 터져나간 채였습니다. 코뼈도 골절되었는지 십자 모양으로 붕대를 하고 있었죠. 제가 상상했던 그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똑똑하고 매력적인 그녀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그녀는 남자와 무슨 대화를 했길래 이토록 처참하게 폭행을 당한 걸까요? 저는 이대로 있을 수 없어 그녀를 찾아가기로 했답니다.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하루빨리 재건하고자 했습니다. 겉옷을 입고 밖으로 나가 택시를 타고 그녀가 입원한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때는 저녁 9시. 병원 취침 시간 1시간 전이었죠. 저는 접수대에서 그녀의 이름을 말하고 안내한 병실로 올라갔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녀는 4인 병실에서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있었죠.
저는 그녀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허리와 머리를 숙이며 인사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진주희 씨 맞으시죠?”
그녀는 움찔거리며 저를 쳐다보더군요. 저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뗐습니다.
“죄송합니다. 놀라실 거 아는데, 염치 불고하고 찾아왔어요. 저는 이수라고 합니다.”
저는 그녀가 한껏 경계하고 있다는 걸 느꼈습니다. 가뜩이나 남자를 혐오하는데, 생판 모르는 남자가 와서 아는 체 하니 당연한 반응이었죠. 그래서 저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지 않고 계속 바닥을 내려다본 자세로 있었습니다.
“...판도라 상자 사이트 운영자분이세요?”
“맞습니다. 당신이 보내준 메시지와 사진을 보고 찾아오게 됐어요.”
“네? 어떻게요? 제가 어느 병원에 입원했는지 말 안 했잖아요.”
“당신 컴퓨터 아이피 주소를 추적해 사는 곳을 알아낸 뒤, 근처 병원은 여기 하나밖에 없다는 걸 알고 찾아왔습니다.”
“병실은 어떻게 알아냈는데요?”
“그것도 별로 어려운 게 아니었어요. 당신 이메일 주소를 알아낸 뒤, 인터넷 검색을 통해 진주희라는 이름을 알아냈어요. 그래서 병원에 물어보고 온 거예요.”
“정말 미치셨네요. 제가 지금껏 상담한 사람이 스토커였다니.”
저는 허리를 더욱 숙이며 입을 뗐습니다.
“죄송합니다. 당신이 보낸 사진을 보고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거든요.”
“근데 왜 그런 자세로 말하시는 거예요?”
“파괴된 당신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요. 제 상상 속세계에서 당신은 제가 아는 여자 중 제일 똑똑하고 매력적인 분이거든요.”
“...이상하신 분이네요.”
“맞습니다. 전 이상합니다. 남들이 보기에 저는 항상 이상한 놈이고, 이상해서 이상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은 열망이 큰 사람이죠.”
그녀는 한참 동안 제가 해괴하다는 듯이 바라봤습니다. 저는 허리와 고개를 숙인 채로 여전히 자세를 풀지 않았죠.
“이름이... 이수 씨라고 했죠?”
그녀는 한결 경계심을 푼 목소리로 이어 말했습니다.
“저도 이수 씨를 한번 뵀으면 했는데, 이런 모습으로는 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네요.”
“아직 저는 주희 씨를 본 게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그녀는 이제 긴장이 풀어졌는지, 제 쪽으로 몸을 돌리곤 입을 열었습니다.
“메시지에 보낸 것처럼, 저 전치 4주 나왔어요. 억울하네요. 10년 전에는 성폭행당하고, 이번에는 폭행당하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저한테 털어놓을 수 있나요?”
“네.. 그래서 사진도 보내준 건데요..”
그녀가 사건 경위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를 성폭행한 것도 모자라 폭행까지 휘두른 범인의 이름은 이준범이었습니다. 저랑 같은 성 씨인 게 더욱 짜증 나는 놈이었죠.
사건의 발단은 이랬습니다. 이준범은 전화로 그녀에게 만나서 다 이야기할 테니까 자기가 운영하는 카페로 오라고 했습니다. 카페를 마감한 뒤 대화를 하자고 했죠.
그녀는 그의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마감 1시간 전에 그가 일하는 카페로 갔고, 드디어 10년 만에 그를 보았죠. 손님이 대여섯 명 정도 있었고, 그는 커피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나왔어.”
그녀는 이준범 등 뒤에 대고 말했습니다. 이준범은 처음에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듯하더니 이내 눈치채곤 입을 열었죠.
“아, 그래. 오랜만이네. 경훈이 한테도 오늘 너 보기로 했다고 말했어.”
“우리 오빠한테?”
그녀는 깜짝 놀랐습니다. 가족들한테는 이 사람을 만난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래. 걔가 깜짝 놀라더라. 남자 만나는 경우가 없는데 왜 그러냐면서.”
“그래서 다 실토하고 사과할 거야? 사과할 생각 없으면 가고.”
“마감 시간 얼마 안 남았어. 손님들 가면 이야기 하자. 뭐 마실래?”
“필요 없어.”
그녀는 그가 주는 것 따위는 마시고 싶은 생각이 1도 없었죠.
“그럼 저쪽 가서 앉아 있을래? 나도 일하면서 생각 좀 정리할게.”
그녀는 대답도 없이 몸을 돌려 카페 구석에 앉았습니다. 잠시 후 이준범은 그녀에게 따뜻한 라테를 건넸지만, 그녀는 반대편 쪽으로 밀어냈습니다.
저는 여기까지 이야기를 듣고는 이준범이 심리를 잘 이용하는 인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첫 번째는, 자기 가게로 그녀를 초대한 것입니다. 그녀에게 설마 내 가게에서 일을 벌이겠냐는 메시지를 준 것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가 경계심이 가득한 모습으로 나타나자, 이준범은 그녀를 한 번 더 허뭅니다. 바로 친오빠 이야기입니다. 너희 친오빠도 나와 함께 있는 걸 아니, 나는 너에게 어떤 해코지도 할 수 없다.라는 암시를 던진 거였죠. 그녀는 거기에 속아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이준범은 실제로 그녀의 친오빠와 통화를 한 적이 없으니까요.
이렇듯 세상에는 지혜로운 인간을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바로 진주희처럼 머리가 비상해 똑똑한 여자와 이준범처럼 사람의 심리를 활용해 음모를 꾸미는 인간이죠.
이 두 종류의 인간들은 사회에 어쩔 수 없이 치열한 경쟁을 펼치는데, 언제나 승리하는 쪽은 이준범 같은 인간입니다.
똑똑한 인간들이 아무리 비상한 능력을 보여준다고 하더라도, 어차피 사회란 곳은 인간 네트워크로 형성된 곳이거든요. 그래서 모략과 음모에 능통한 인간이 높은 자리에 서게 됩니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이 호랑이 굴에 들어왔다는 사실도 감지하지 못한 채 마감 시간을 기다렸습니다. 이내 손님들이 모두 떠나자, 이준범은 테이블을 치우기 시작했죠. 식기를 모두 세척하고, 현관문에 있는 안내판을 ‘Open’에서 ‘Closed’로 뒤집었습니다. 그리고 바깥이 보이는 창가에 블라인드를 내리고, 현관문 앞에 있는 조명을 끄고, 자기가 마실 커피를 내린 뒤, 머그잔을 들고 그녀 앞에 앉았죠. 그는 차갑게 식어 있는 라테를 힐끗 보고 입을 뗐습니다.
“안 마시는 거야? 애써 만든 건데.”
“오빠 주는 건 손도 대기 싫어.”
“직설적이네.”
“지금 최대한 인격적으로 대해주는 거야.”
“그런가?”
이준범이 커피를 마시자 그녀가 말했습니다.
“시치미 떼지 말고 말해. 10년 전에 나 성폭행한 거 오빠 맞지?”
“글쎄... 어디서 그런 일을 당한 건데?”
“아파트 계단. 정확히는 6층.”
“7층 아니었어?”
“뭐?”
“우리 몰래 담배 피웠던 곳 7층 아니었냐고.”
“지금 장난해?”
그녀는 테이블 위에 있는 손을 말아 쥔 뒤 이어 말했습니다.
“당장 사과해. 그때 나한테 그런 짓한 거 사과하라고.”
“내가 뭘 잘못했는지 알아야 사과하지. 어디 기억나게 좀 해봐.”
이준범은 여유롭게 다리를 꼬고는 허리를 의자에 기대며 말했습니다. 그녀는 그가 사과할 생각이 조금도 없다는 걸 알고는 빠르게 자리에서 일어섰죠.
“갈게.”
그때, 이준범이 그녀의 손목을 잡았습니다. 그 순간 그녀는 돈벌레가 피부에 스친 것과 같은 소름을 느꼈습니다.
.
“시발, 이거 안 놔? 너 이러는 거 성추행이야.”
“6층이 아니라 7층이라고.”
“놓으라고!”
“우리가 담배 피웠던 층도 7층이고 그 짓을 같이 한 것도 7층이라고.”
그녀의 얼굴이 일순간 굳어졌습니다. 이준범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입을 뗐습니다.
“근데 참 이상하다. 난 분명 너한테 양해를 구했는데, 너한테 하겠다는 신호를 보냈고, 네가 응해서 한 거야. 기억 안 나?”
“또라이 같은 새끼. 너랑 더는 할 얘기 없어.”
그녀가 이준범의 손을 뿌리치자, 그는 더욱 세게 손목을 잡았습니다.
“아직 얘기 안 끝났어. 오해는 풀어야지.”
“오해는 무슨 오해! 이거 놓으라고!”
“니가 다리를 벌려서 내가 집어넣은 거라는 게 팩트야. 아직도 모르겠어?”
“사이코 같은 새끼!”
짝.
그녀는 손바닥으로 이준범의 뺨을 내리쳤습니다. 그는 돌려진 고개를 다시 제자리에 놓으며 미소 지었죠.
“야, 나 마조히스트 아냐.”
“뭐라는 거야!”
이준범이 힘을 줘 그녀의 팔을 잡아당겼습니다. 양손으로 그녀를 꽉 끌어안은 뒤 코로 그녀의 향기를 맡았죠.
“주희야. 냄새 좋다. 10년 전이랑 똑같네.”
그녀는 뒷머리로 그의 코에 박치기를 했습니다.
“아악... 이 미친...”
그가 손을 풀자 그녀는 재빨리 일어나 말했습니다.
“쓰레기 같은 새끼. 너 두고 봐. 내가 어떻게 하나.”
그녀는 후회했습니다. 차라리 그냥 약을 타서 죽이는 게 옳았다고 생각했죠. 사과를 받아봤자 얼마나 마음이 편해진다고. 자신의 선택이 틀렸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녀는 카페 현관문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현관문 손잡이를 돌리자, 꿈쩍도 하지 않는 문이었죠. 이준범이 붉어진 코를 만지며 입을 뗐습니다.
“너 온다고 해서 특별히 잠금장치 설치했어.”
그녀가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도와달라고 소리치자 이준범이 뒤에서 그녀를 덮쳤습니다. 오른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고, 왼손으로 허리를 감쌌습니다. 그리고 카페 안쪽으로 질질 끌고 갔죠. 그녀는 꼭 포식자에게 붙잡힌 느낌이었습니다. 몸통을 물고는 심연 속 깊은 곳으로 빠져들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