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돌아오기 위해
가끔, 아니 꽤 자주 그런 날이 있다. 모든 걸 버리고 도망가고 싶은 날.
기분이 바닥을 치다 못해 땅을 뚫고 아주 깊은 곳까지 내려가는 날.
또 그런 날에는 할 일이 기분 나쁘게 쌓여있다. 분명 내가 만들어놓은 일들이지만 왜 그리 꼴 보기 싫은지.
애써 마음을 다잡아봐도 돌아오는 건 없다.
아니, 숨을 쉴 여력이 있다면 다행이다.
숨을 쉴 힘도 남아있지 않고 손가락을 까딱할 힘도 남아있지 않을 때가 있다.
날 짓누르는 저 커다란 바위 밑에서 아등바등하는 내 모습.
살아보겠다고, 오늘을 살아내겠다고 힘써보는 모습.
그럴 때는 그런 내 모습조차 싫어진다. 뭐 대단한 걸 하겠다고 애쓰고 있는지.
그래서 그냥 지금의 상태를 인정하기로 했다.
몸에서 모든 기운이 빠져나가 빈털터리가 돼버린 날은 그냥 빈털터리로 살겠다고.
굳이 뭘 해보려, 힘을 내보려, 다시 끌어올리려 하지 않겠다고.
모든 일을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에너지로 꽉 차 있어도, 반대로 빈털터리가 돼버려도 ‘나’다.
타인이 아닌, 바로 ‘나’다.
오늘의 주인공인 내가 기분이 좋지 못하다면, 웃을 힘도 남지 않고 공허하다면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굳이 바꾸려 힘쓰지 않으려 한다. 오늘이 틀린 게 아니기 때문에.
누군가는 이런 태도를 ‘도망’이라 말한다. 그냥 하기 싫은 걸 멋진 말로 포장하는 거 아니냐고.
그래, 맞다. 그냥 다 귀찮아서, 하기 싫어서 헐레벌떡 도망가는 거다.
현실에 쌓여있는 문제들의 무더기에서 도망치는 중이다.
그러나 타인에게서 도망가는 게 아닌, 스스로에게서 잠시 도망가는 거다.
다시 더 나은 모습으로 돌아오기 위해 잠시 도망치고 있을 뿐이다.
다시 스스로에게 돌아오리라 다짐하고 약속한다.
나이기 때문에, 나에게는 나에게서 도망칠 권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