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곰곰 Jun 05. 2020

도망치는 중

다시 돌아오기 위해


몽글몽글 구름


가끔, 아니 꽤 자주 그런 날이 있다. 모든  버리고 도망가고 싶은 .


기분이 바닥을 치다 못해 땅을 뚫고 아주 깊은 곳까지 내려가는 날.


또 그런 날에는 할 일이 기분 나쁘게 쌓여있다. 분명 내가 만들어놓은 일들이지만 왜 그리 꼴 보기 싫은지.


애써 마음을 다잡아봐도 돌아오는 건 없다.


아니, 숨을 쉴 여력이 있다면 다행이다.


숨을 쉴 힘도 남아있지 않고 손가락을 까딱할 힘도 남아있지 않을 때가 있다.


날 짓누르는 저 커다란 바위 밑에서 아등바등하는 내 모습.


살아보겠다고, 오늘을 살아내겠다고 힘써보는 모습.


그럴 때는 그런 내 모습조차 싫어진다. 뭐 대단한 걸 하겠다고 애쓰고 있는지.


그래서 그냥 지금의 상태를 인정하기로 했다.


몸에서 모든 기운이 빠져나가 빈털터리가 돼버린 날은 그냥 빈털터리로 살겠다고.


굳이 뭘 해보려, 힘을 내보려, 다시 끌어올리려 하지 않겠다고.


모든 일을 잘할 수 있을 거라는 에너지로 꽉 차 있어도, 반대로 빈털터리가 돼버려도 ‘나’다.


타인이 아닌, 바로 ‘나’다.


오늘의 주인공인 내가 기분이 좋지 못하다면, 웃을 힘도 남지 않고 공허하다면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굳이 바꾸려 힘쓰지 않으려 한다. 오늘이 틀린 게 아니기 때문에.


누군가는 이런 태도를 ‘도망’이라 말한다. 그냥 하기 싫은 걸 멋진 말로 포장하는 거 아니냐고.


그래, 맞다. 그냥 다 귀찮아서, 하기 싫어서 헐레벌떡 도망가는 거다.


현실에 쌓여있는 문제들의 무더기에서 도망치는 중이다.


그러나 타인에게서 도망가는 게 아닌, 스스로에게서 잠시 도망가는 거다.


다시 더 나은 모습으로 돌아오기 위해 잠시 도망치고 있을 뿐이다.


다시 스스로에게 돌아오리라 다짐하고 약속한다.


나이기 때문에, 나에게는 나에게서 도망칠 권리가 있다.




이전 09화 엉킨 목걸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