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킨라떼와 책이 있는 10월은 상상만해도 따뜻해.

대기실에서

by 손두부

학교가 끝난 후 바로 아이의 스피치 떼라피를 하러갔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입구에서 사인을 하고, 대기실에 앉아 아이가 호명될 때까지 기다렸다.

매주 보는 얼굴들이 이미 대기실에는 가득했다.

떼라피를 받는 클라이언트들은 대부분 어린아이들이고 부모들 역시 모두 나보다 젊다. 이런 떼라피는 어릴수록 효과가 크기 때문에 나의 아이처럼 사춘기에 접어든 틴에이져를 끝으로 더 나이가 든 클라이언트는 사실 이곳에서 찾아보기가 어렵다.

시간이 되고 한 명씩 호명될 때마다 아이들은 방 안으로 불려 들어갔고 대기실 안 웅성거림은 점점 사라져 갔다. 마침내 부모들만 남아있게 되면 하나 둘 셀폰을 여는 것으로 각자의 시간 때우기에 들어선다.


나는 오랜만에 고개를 들고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저기 엄마 대신 오늘은 할머니가 아이를 데리고 오신듯하다.

혼자 따로 떨어져 앉아있는 젊은 아빠도 있다.

어떤 엄마는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스페니시로 시끄럽게 전화통화를 하고 있다.

나는 알 수도 없고 알아들을 수도 없는 그들의 눈빛과 생각과 언어를 가끔씩 내 방식대로 상상해보곤 한다. 그들은 최근에 진단을 받고 이 서비스를 받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불안과 기대, 긴장과 희망 같은 것들이 뒤섞인 부모들의 표정은 한껏 고조되어 있었다.


내 아이가 처음 진단을 받았던 날이 기억난다.

새 학년 학기초만 되면 출석부를 보며 지목할 학생을 훑는 선생님의 눈으로부터 내가 호명되지 않기를 바라며 머리를 푹 숙이곤 했었다. 하지만 늘 내 이름은 불려졌고 지금도 그렇게 되버렸다. "아이는 자폐입니다."

이후, 아이는 사회성이 좀 떨어지는 것 외엔 학교생활을 그럭저럭 따라가고있었다. 나름 희망적이었다.

하지만 미들스쿨을 졸업하는 해, 갑자기 증세가 심해졌다. 결국 지금은 정신병원에서 약물치료를 받고있다.

그 즈음 어릴 때 잠시 받았던 스피치 떼라피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고, 이 곳 스피치 떼라피 센터에 가장 나이 많은 클라이언트로 들어오게 되었다.

다시 대기실에 앉아 부모들을 둘러본다.

그들의 눈빛에서 잘할수있다는 패기 긍정의 힘, 희망들이 엿보인다. 무엇하나 나쁜 것이 없다. 모두 착하고 성실한 부모들이다.

그래서인가?

사실 나는 이곳 대기실에 앉아있다 보면 그들의 모습과는 상대적으로 내가 마치 밀려 쓴 기말고사 답안지 같이 느껴져 종종 가라앉는다.

하지만 어쩌겠나. 내게 닥친 일을 하나씩 맞닥들이는 수밖에.

다만 나는 이 문제에 맞서기 위해 상기된 얼굴로 섣부른 기대에 찬, 무모한 낙관주의자는 되지 않으려고 주의하고 있다. 왜냐하면 노력하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나를 급격한 희망에 쌓이게 한적이 있었고, 그것이 조급한 마음을 가지게 했고, 결국 헤어날 수 없는 실망을 가져다준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저들의 희망을 부질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니다. 내가 오늘을 낙담하고 비관적으로 대충 살겠다는 뜻도 아니다.

강인함으로 무장된 모습은 아니지만, 나는 지금 다 알지 않아도 되는 일이라도 예상하고 알아보는데 시간을 쓴다. 가야 할 길이 어떤 변수에 의해 또 바뀌고 혼란 속으로 빠지게 되더라도 너무 놀라지 않게, 그리고 지금 당장 내가 어디를 바라보며 나아가야 할지 대충의 방향을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막연한 불안감을 없애주고 약하게나마 다가올 미래에 대한 결연한 자세를 가지고 오늘을 살아가게 해 준다.

나는 희망을 버려서도 안되고, 섣불리 확신에 차서도 안된다.

나는 다가올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서도 안되고, 모든 걸 다 알아서도 안된다.

나는 그 사이에서 내 마음을 잘 컨트롤하면서 내 하루가 흔들리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다 좋은 일이 생기면 감사하면 되는 일이고, 그런 일이 안 생겨도 원망할 곳은 없다.

나는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으로 오늘의 가치를 둔다.


6시 정각, 수업이 끝날 시간이 되었다.

모두들 선생님과 인사를 하고 한 명씩 문을 열고 나온다.

부모들은 아이를 받고 담당 선생님과 그날 수업에 대해 이야기한다.

"오늘은 잘했어요. 포커스도 잘하고. 대화하는데 필요한 몇 가지 스킬을 가르쳐주었어요. 집에 가셔서 이것을 적용하고 연습하시길 바래요. 그럼 좋은 저녁 되시고 다음 주에 만나요."

짧게 선생님과 대화를 하고 한 명씩 나간다.

나는 멀어져 가는 그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속으로 말한다.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keyword
이전 03화9월 인디안썸머는 잠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