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아이를 둔 부모들 중 서로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두어 달에 한 번씩 사교모임을 가져오고 있다.
우리는 못 본 사이에 생긴 아이의 문제점에 대해 서로 의견을 나누거나, 새롭게 알게 된 유용한 정보를 이 모임에서 공유하기도 한다.
물론 주인님들(아이들) 없는 오전 시간을 틈타 신하들(부모들)끼리 모여 스트레스를 풀겠다는 목적도 없는 건 아니다.
“자, 자.. 일단 공짜 영화티켓입니다. 오랜만에 문화생활부터 하고 담소 나누기로 하지요.”
주인님들을 학교로 모셔다 드리고 오랜만에 외출한 신하들은 설레는 마음을 안고 새로 개봉한 영화를 보기 위해 자리를 잡는다.
재난 영화답게 시작부터 긴박감 넘치는 영상과 음악으로 근육이 덩달아 경직된다.
“이상하죠? 이런 텐션이 오히려 카타르시스를 주는군요.” 한 신하가 말한다.
“역경에는 역경으로 대처하는 것이죠. 피하지 말자고요. 아시면서.” 다른 한 신하가 대꾸한다.
우리는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이젠 무엇을 좀 먹으러 가볼까요?”
영화가 끝나고 우리는 근처에 유명하다는 이태리 레스토랑으로 향한다. 레스토랑까지 걸어가는 동안 어두운 영화관에서 눈치채지 못한 서로의 상큼한 의상을 발견하고는 칭찬을 주고받는다.
야외 옥상, 하얀 파라솔 밑에 앉아 우아한 점심을 서브받는다.
엄마, 아니 신하들에게 최고의 음식, 바로 '남이 해준 음식'이 등장한다. 모두 환호를 한다.
“... 하지만 저는 그렇습니다. 피할 수 있다면 고난은 피하고 싶죠.” 한 신하가 아까 했던 대화를 계속 이어간다.
“그래도 주인공은 그 역경을 이겨내고 마침내 꿈을 이루었죠.” 듣고 있던 다른 신하가 말한다.
“그럴까요? 영화가 아니라 실제로도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모두 묵묵부답.
잠시 가벼운 침묵이 지나간다.
“그러고 보니 살이 많이 빠지신 것 같습니다.” 한 신하가 옆에 있는 신하에게 묻는다.
“아.. 네, 주인님이 복용하는 약에 부작용이 나타났습니다. 백혈구가 내려가고 있어요. 의사 말이 다른 약으로 바꿔 볼순 있다고 합니다. 어쨌든 플랜 B가 있다는 건 다행인 일이죠.”
“그렇죠. 고마운 일이지요. 그나저나 살이 빠지셔서 이뻐지셨습니다.”
"그렇죠?" 체중이 내려간 신하는 이제 제법 홀쭉해진 자신의 배를 두드리며 대답한다.
모두 웃는다.
무리 중 한 신하가 최근 주인님의 수술 날짜를 받아놓은 다른 신하에게 조심스럽게 질문을 한다.
“수술 날짜가 언제죠?”
“네, 이번 달 말입니다. 지난번 수술해주신 의사 선생님을 따라 타주로 가서 수술을 받을 것 같습니다. 주인님의 척추에 박은 철심이 문제가 생긴듯합니다.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저 빵 바구니를 좀 건네주시겠습니까? 이 집 빵이 좋아요.”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무리가 흘끔흘끔 우리를 쳐다보기 시작한다.
“여기에 찍어 드십시오 훨씬 맛있을 겁니다.”
올리브 오일과 발사믹 소스를 당겨 놔 준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그 김에 로드트립을 간다 생각하고 있습니다. ‘호텔 투어’라고 해두지요. 주인님께서 호텔을 좋아하십니다.” 빵을 우물거리며 말한다.
“좋은 생각입니다. 그렇담 선블록을 꼭 챙기십시오. 장시간 운전을 하면 왼쪽 빰에만 기미가 올라오죠.”
모두들 맞장구를 치며 좋은 선블록에 대한 이야기로 빠진다.
“저희 주인님께선 틱이 심해졌습니다. 자 한번 보시죠.”
무리들 중 젊은 신하 한 명이 녹화한 동영상을 모두에게 돌려가며 조언을 구한다.
“너무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지 않습니까? 틱이 없던 사람도 생길 겁니다. 방학 동안 스트레스를 너무 주신 것 아닙니까?” 연륜이 많은 신하가 말한다.
“아... 그건 아닌데... 그나저나 좋은 영양제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다 같이 복용해보시죠. 아마존에서 살 수 있습니다.” 말을 꺼낸 젊은 신하는 식은땀을 흘리며 얼른 화제를 바꾼다.
“저는 주인님의 보조제를 하나 오더 했습니다. CBD 오일이죠.
근데 주인님에게 드리기 전에 제가 모르모트가 돼보기로 했습니다. 복용한 지 한 달째 돼갑니다”
이 이야기의 시작에 우리보다도 오히려 옆 테이블에 있는 그룹이 더 귀를 쫑긋 세운다. 아무리 캘리포니아에서는 합법화되었다지만 정서상 마리화나라는 것엔 거부감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수군대기 시작한다.
“기미상궁을 자처하셨군요!” 다들 놀라며 이야기를 계속 듣는다.
“이것은 철저한 개인 소견이라 모든 이에게 똑같이 적용된다고 말할 순 없습니다만, 제 경우는 복용 후, 잠이 잘 와서 가끔씩 수면용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인님에게 굳이 권할 이유는 못 찾았습니다. 어디까지나 제 의견입니다. 주인님들의 상황은 모두 다르니까요.”
“좋은 얘기입니다. 오늘 본 영화의 주인공처럼 역경은 실험쥐를 자청하는 용기를 주는 것 같습니다.” 그중 나이 많은 신하가 말한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라텍스 알레르기가 생겼습니다. 수술을 많이 한 경우에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다 하더군요. 몇 주 전 풍선을 불다 숨이 막혀서...”
CBD 오일을 사용한다던 신하는 또 다른 이슈에 대해 말한다.
“풍선을 너무 열심히 불어 서가 아니고요?” 어떤 신하의 농담 덕에 모두들 한바탕 웃는다.
우리 모두는 크게 웃으며 테이블에 팁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우리의 말을 1도 못 알아듣는 파란 눈의 웨이트리스는 환한 눈웃음으로 인사를 대신하지만,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무리들은 웃고 있는 우리를 어이없다는 듯 쳐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