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무기력하게 보내지 않는 방법
나는 게으름뱅이고 이따금 환절기 감기처럼 잠식해오는 간헐적 무기력증 환자다.
무기력이 골수까지 절어있을 때의 본인은 인간 나무늘보, 퍼진 순두부 등으로 불리는데 퍽 그럴 듯하다. 종족이 사람이라는 것만 다르지 하는 행태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요리도 하지 않고 청소도 하지 않는다. 하루의 절반 이상을 누워서 웹툰을 보거나 넷플릭스를 보는 식으로 시간을 탕진하고 배고프면 배달 음식을 시킨다. 모든 것이 귀찮아서 가족과 연락을 하거나 친구와 톡을 하는 것도 미루기 일수다. 집 밖으로는 당연히 나가지 않는다. 당연히 시시각각 근손실에 남은 삶의 빈칸이 공허하게 날아간다.
물론 이런 경우 대부분 일적이든 사적이든 열정을 불태우고 난 뒤 방전된 상태에서 찾아오는 증상일 경우가 많기에 처음 하루 이틀 정도는 이것도 썩 나쁘지 않다. 열심히 일했으니 이래도 된다 자위하고 마음껏 게으르게 덕질이나 하는 게 너무 행복하다. 사실 가끔 하루 쯤은 이렇게 나 자신을 방목해도 괜찮지 않은가 싶기도 하다. 다만 문제는, 이와 같은 일상이 이틀을 넘어서 사흘째에 접어들면 슬슬 경보음이 뜬다.
하루 루틴과 내 몸에 새겨진 리듬감이라는 게 매우 무서운 게, 저런 나무늘보 상태가 3일이상 유지되면 그게 몸에 배어 굳어버린다. 수면 시간 루틴도 망가져서 정각에 자려해도 잠이 안 온다. 귀차니즘에 쩔어 무엇도 하기 귀찮아진다. 일탈이 좋기는 한데 다시 되돌려 놓기란 무척 힘이 든다. 그러니 일상 루틴 복구력이 망가지기 전까지, 1~2일까지만 우리집 소를 방생하는 게 좋다. 그 이상 가면 하루면 될 것을 일주일, 혹은 그 이상을 공들여 다시 되돌려 놔야 하기 때문이다(근 몇 년간 나는 이 어리석은 요요현상을 반복해왔다).
해서, 사람은 억지로라도 최소한의 테두리, 자신만의 하루 루틴, 혹은 별거 아니더라도 반드시 지키는 습관따위가 필요하다. 얽매이기 싫어하는 나도 이제서야 루틴의 중요성을 깨달아가는 참이다. 나의 루틴, 규칙적인 습관은 단순히 몸에 배인 일과가 아니라 내 일상이 혼돈으로 잠식되지 않게 지켜주는 등대이다.
특히 출퇴근이 없는 나는 이게 필수이다. 느긋한 게으름뱅이라 하루하루 되는대로 자유롭게 사는 걸 좋아했는데, 이렇게 낭비한 시간들이 미래의 나를 결정짓는다는 아주 간단하고 무서운 진실을 깨달았다. 하루 한 시간의 마법이라 했던가. 내가 귀찮음에 절어 날려버린 시간의 절반만 글을 썼어도 벌써 몇 권을 썼을지도 모른다. 이리 생각하니 매우 뼈 아프지만, 어쩌겠는가. 그 시간의 대부분을 잡생각을 하거나 덕질을 했으니 나름 인풋을 한 것이라 스스로 위로해 본다.
그렇다고 매일매일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처럼 몇시에 정확히 일어나서 운동을 하고 몇 시에 아침을 먹고... 뭐 이런 각을 잰 생활은 나와 맞지 않는다. 취향도 아니고 할 자신도 없다. 뭐든 꾸준히 하려면 성실성보다는 관성이 있어야한다. 그럭저럭 할 만해야 계속하는 법이다. 정말 하기 싫으면 죽지 않는 이상 안 하다가 기회를 다 놓치고 죽는 게 사람이다.
해서 나는 최소한의 기준만을 잡았다.
1. 반드시 아침이나 저녁 중 한 번 더운 물로 샤워하기
-혈액순환과 활력 증진, 정신 환기를 위해서
2. 특별한 날이 아니라면 저녁은 가볍게 먹기
-잠이 잘 오고 몸이 훨씬 가벼우며 붓지 않는다
3.하루 한 시간 산책이든 요가든 운동을 한다
-필수! 이건 최소한이다. 특히 산책과 런닝은 스트레스 해소에 그만이다.
4.최소 12시 반 안 에는 자려고 노력한다
-잘 안 지켜질 때가 많은데, 욕심으로는 10시 쯤에는 자는 루틴을 갖고 싶다.
5. 밀가루, 설탕, 짜고 자극적인 음식을 최소한으로 먹는다
-밀가루와 설탕은 백해무익하다. 이 부분은 지킨 지 1~2년 정도 되었고 아예 안 먹는 건 불가능 하지만 신경 써서 가려 먹는 편이다. 짜고 자극적인 건 정말 가끔 땡길 때 먹는다. 하지만 본가에 오면 지키기 힘들어서 얼굴이 잘 붓고 소화가 더디다.
6. 소식한다.
-위장이 약한 편이라 소식하면 훨씬 컨디션이 좋다.
7.하루에 글 하나 이상 쓴다.
-집에 있으면 휴식 공간과 작업 공간이 구분이 되지 않아서 억지로라도 카페에 가서 뭐든 일단 글을 끄적이는 버릇을 들였다. 소설이든 에세이든 상관 없다. 마감이 있든 없든 반드시 하루에 글 한 개, 약 오천자 정도는 쓸 것. 이 습관을 들이니 일상 불안이 훨씬 줄어들고 머릿속이 가벼워졌다.
식습관을 제외하면 네 가지 정도는 일상을 이루는 중요 요소다. 샤워, 운동, 글쓰기, 일찍 잠자리에 들기.
이것만 지켜도 일상이 훨씬 견고하고 단단해지는 걸 느꼈다. 내 기준에서는 쉽고 계속 할만한 것들이고. 취침을 제외하면 일부러 시간따위를 정해두지 않았다. 내 성향상 딱 규칙처럼 정해버리면 스트레스를 받고 하기 싫어지기 때문에 자율성과 자유도를 늘린 것이다. 하루 안에 하기만 하면 되니까 나는 내가 샤워하고 싶을 때 샤워하고 산책 나가고 싶을 때 아침이든 저녁이든 나간다. 글쓰기는 어떤 성취 기준을 정하지 않고 그날 그날 내가 쓰고싶은 글을 쓰니까 훨씬 부담도 적고 필력과 감각을 유지하는데에 도움이 된다. 뭣보다 내 기준에서 '할 일'을 하니까 성취욕이 채워지고 자존감도 올라갔다.
특히 글쓰기 루틴은 정말 나에게는 획기적인 이변이었다.
스티븐 킹의 나는 매일 아침 영감이 찾아오게 한다, 라는 말을 이해 못했는데 이제는 조금은 알 것도 같다. 영감이라는 건 생각보다 중요한 게 아닐 수도 있다. 일상에 널리 깔려 있는, 바람을 타고 하늘하늘 옮겨다니는 민들레 씨앗처럼 내 옆에 항상 있는 것인데 내가 창문을 닫아두어서 그냥 사라져버린 걸지도 모른다. 일단 쓰다보면 뭐든 나오긴 한다. 다만 내가 정의내리고 생각해 왔던 '영감'이라는 것은, 번개처럼 번쩍이며 찾아와 이걸 안쓰면 못 배기는 그런 상태만을 일컬었는데 그런 큰 건이 아니더라도 자잘하고 소소한 것조차 영감이 아닐까 한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이것도 매일, 평생 모이다보면 언젠가 대단한 것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세운 루틴들의 기준은 철저하게 '내가 계속 할만한 것인가'가 였다. 얼핏 보면 별거 아니지만 내게는 무척 중요한, 하루의 흐름을 바꿀만한 주춧돌들이었다. 시간을 무한으로 자유롭게 쓸 수 있는 프리랜서의 삶을 살아 보았는가? 잘 모르는 이들은 부러워하지만 결코 쉽지가 않다. 회사원이라면 딱딱 보이는 적들-업무, 괄괄한 상사, 출퇴근 등-이 있겠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보이지 않는 무형의 적들과 싸우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그 적들은 대개의 경우 거울 속의 나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나는 나를 잘 다루고 통제해야 한다. 내가 너무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안 좋은 습관과 일상에 점령 당해 망가지지 않게.
그러니 '나'를 잘 다루기 위해서는 '나'를 잘 알아야 했다. 내 한계선이 뭔지, 내 성향과 몸에 배인 습관, 욕구 등이 뭔지.
예컨대 나 같은 경우에는 건강하게 행복한 삶을 살려는 욕구가 강하지만 나태함 또한 많고 합리화도 제법 잘한다. 다만, 한 번 물꼬를 틀어 방향을 바꾸면 잘 따라가는 편이다. 그래서 내 활력과 욕구를 자극할 만한 것들을 루틴으로 만들었다. 더운 물을 가득 맞으며 샤워로 하루를 시작하면 혈액이 순환하며 활기가 올라간 몸이 방청소든 빨래든, 글쓰기든 뭐라도 하고 싶어진다. 산책도 마찬가지다. 나가기가 귀찮아서 그렇지 막상 나가면 난 망아지처럼 음악을 들으며 계속 땀이 날 때까지 걷는다.
또한 실현 가능성이 있고 지속 가능해야 한다. 예시로, 설탕과 밀가루를 아예 먹지 않기로 했을 때, 단순하게 모든 베이커리와 디저트, 면 음식을 먹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나는 빵도 좋아하고 달달한 디저트와 잔치국수도 좋아한다. 해서 밀가루와 설탕 대신 쌀가루 빵이나 쌀국수, 아몬드 가루와 대체 당으로 만든 비건 디저트 따위를 적정량으로 즐기고는 한다. 내 욕구는 그 정도면 채워지는 편이라 소화도 잘 되고 요즘 성분과 맛도 좋은 제품들이 많아서 만족스레 소비하고 있다. 약속이 있거나 외출시에는 최선을 다 해서 적게 먹는 메뉴를 고른다. 노력이 중요한 거니까. 이게 습관이 되다 보면 입맛도 변해서 혀가 담백해지고 자극적인 것을 기피하게 되며 지나치게 단 것은 입에 맞지 않게 된다.
결국, '나'를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할 만한 수위와 기준, 그리고 내 상태와 건강, 목표 따위에 어떤 것이 필요하고 무엇부터 당장 시작해야 하는지.
물론 위의 규칙들은 내 상황과 스케줄에 따라 못 지켜지기도 하고 다음 날로 넘어가기도 한다.
다만 내가 정한 기준이 있으니 대책없이 한 없이 떠내려가는 것만 같던 위기감이나 초조함 따위는 많이 축소할 수 있었다. 삶이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해 보여도 이렇게 보면 별 거 아닐 때가 많다.
일상의 중요성을 깨닫는 순간 내 목표와 한 걸음 더 가까워질 수 있다.
결국 우리의 삶이라는 것도 그 별거 아닌 하루들이, 내가 버린 하루 살이 시간들이 쌓이고 모여 이뤄진 집이기 때문이다. 어떤 일상을 보냈는가에 따라서 끝자락에 남은 건물이 폐허이거나 성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것이 시간의 마법이고 위대함이며 그래서 더 지독한 시간의 무서움이다. 시간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전무하다.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지금까의 내가 시간을 우습게 보고 탕진해 왔다면 지금부터라도 좀 더 공손하게 굴고 나를 쌓아가는 데 집중할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