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내가 태어났다, 여동생이 생겼다!

by 몽당

2015년 4월.


4월 2일.

둘째가 언제나 같은 주제, '기차'를 그리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기차를 하도 많이 그려주다 보니 나중엔 실제 기차의 구조를 훤히 다 알게 될 정도였다. 특히 자주 그린 것은 굴뚝이 달린 증기기관차였다. 강렬한 검은색의 몸체에 구릿빛이나 은빛으로 빛나는 금속관들이 달려있었다. 그림을 보고 흡족해하는 둘째의 모습을 볼 때면 너무나 뿌듯해서, 나는 점점 더 사진처럼 세밀한 기차 그림들을 그리게 되었다.


아이들 아빠는 거기다 한 술 더 떴다. 종이와 풀만 가지고, 종이 기차 모형들을 잔뜩 만든 것이다.

집에는 세계의 기차 도안이 담긴 책이 있었다. 그 책에서 도안을 잘라내어 조심스럽게 접고 풀로 세심하게 잘 이어 붙이면, 세계의 여러 기차 모델들을 손바닥만 한 크기로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작다 보니 찢어지지 않게 잘 접고 붙이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 남편은 하루 종일 매달려 그걸 스무 개도 넘게 만들어 놓았다.


남편이 도안들을 거실 바닥에 늘어놓고 가운데에 철퍼덕 앉아서 풀로 붙이는 동안, 둘째는 주변을 맴돌며 기웃기웃 구경을 했다. 그러다가 다 만들어진 기차 모형들을 가지고 혼자 놀기도 했다. 그 광경을 보고 있자니, '누가 공돌이 아니랄까 봐....' 속으로 생각하면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기차 그림을 정확하게 그리려고 애쓰는 나나, 정교한 종이 기차 모형을 만드는 남편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둘 다 기계공학과 출신이어서인지 아이와 같이 기차를 만든답시고, '잘' 만드는 것에만 푹 빠져버렸던 것이다.

평소 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노는 것을 볼 때면 남편은 가끔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여보는 어린 시절에 못 해본 것들을 이제 해보는 사람 같아."

틀린 말은 아니었는데, 내가 보기엔 남편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 완벽한 종이 기차 모형들은 며칠 안되어 실수로 밟아서 납작해지고 말았다. 둘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아빠가 당연히 다시 만들어주리라 믿었지만, 애석하게도 아빠도 지쳐서 두 번은 만들어주지 못했다. 한편 내가 공들인 기차 그림들 역시 둘째가 검은색 크레파스로 꼼꼼하게 색칠해 주어서 원래 그림은 알아볼 수 없게 됐다. 그렇게 기차 덕후가 될 뻔했다는 증거물들, 수많은 기차 작품들은 우리 부부의 기억 속에서만 남게 됐다.


둘째는 초등학생 때부터 총을 좋아하게 되어서, 이제 기차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어버린 지 오래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서는 잊히지 않을 것 같다. 남편의 손재주가 그렇게 좋은지 처음으로 알게 해 준 그 종이 모형들 말이다. 기차를 오리고, 접고, 붙이는 데에 몇 시간이고 열중하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손재주를 언젠가 다시 볼 수 있을 그날을, 나는 기다리고 있다.



4월 18일.

드디어 막내가 세상에 나왔다.

세상에 둘도 없이 소중한 너를 품에 안았다.



4월 21일.

셋째와 내가 병원과 산후조리원에서 3주의 시간을 보내는 사이, 천방지축 두 형제는 아빠가 돌봤다.

사실 이 무렵에는 남편이 육아보다 일을 우선시하는 사람이었기에, 미덥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처음엔 '나 없이는 쉽지 않을걸? 어디 내 소중함을 실컷 느껴봐라.'라는 마음이 있었다. 남편이 혼자서 아이들을 돌보면 금세 항복할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영상 통화를 해보니 나 없이도 너무 잘 해내고 있었다!


남편 혼자서도 애들에게 끼니를 요리해 먹이고, 데리고 나가서 놀아주고, 잘 재우기까지. 화면 속 아이들은 신이 나서 깔깔거렸고, 밝은 얼굴로 “엄마, 아빠랑 공원 갔다 왔어!” 하며 자랑까지 했다.

"아니, 이렇게 잘하면서 그동안은 왜 안 한 거야?"

이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꿀꺽 삼키고 넘어갔다. 남편이 얄미우면서도, 또 대견하기도 해서.


아마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남편 역시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당분간 더 큰 육아의 소용돌이로 빨려 들어가게 될 것이고, 우리 둘이 서로 의지해서 헤쳐 나가야 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말하진 못했지만, 사실 고마웠다. 두 형제를 최선을 다해 돌봐줘서 너무나 든든했다. 어쩌면 그런 고마움들이 마음에 오래 남아, 그 후 끝없이 이어진 육아의 파도를 함께 넘어갈 수 있도록 해 줬던 것 같다.



2015년 5월.


5월 9일.

드디어 막내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들의 보금자리로 입성.



5월 10일.

형제는 셋째의 기저귀나 옷을 갈아입힐 때마다 쪼르르 들어와서는, 아기 침대 난간에 매달려 구경을 했다. 셋째도 눈을 굴리며 오빠들을 구경하는 듯했다. 둘째는 동생이 생긴 것이 처음이라 마냥 신기해하는 눈치였지만, 첫째는 두 번째 경험이라 그런지 생각이 많은 얼굴이었다.



5월 15일.

'동생이 하나 생겼을 때도 너무 힘들었는데, 이젠 둘이라니! 엄마는 더는 나를 사랑하지 않나?'

그런 뜻이었을까, 첫째의 표정은. 셋째를 바라보는 첫째의 시선에는 걱정과 설렘이 묘하게 섞여 있었다.


첫째는 처음 동생이 생겼을 때, 그러니까 둘째가 태어났을 때 많이 힘들어했다. 그도 그럴 것이 둘째가 태어난 지 100일 조금 지났을 때 아이들 아빠가 미국으로 1년간 파견을 떠났던 것이다. 엄마를 동생에게 빼앗긴 상황에 믿고 의지할 아빠마저 사라졌으니. 고작 두 돌이 막 지났던 첫째는 심리적 충격이 컸는지, 몇 주간 변비를 앓으며 고생을 했다.


여기서 이 변비 얘기를 안 하고 넘어갈 수가 없다. 그때 나 혼자서 갓 100일 된 둘째와 두 돌이 막 지난 첫째를 돌보는 와중에, 변비라는 큰 난관에 부딪혔다.


처음에 첫째가 서너 일마다 대변을 볼 때는 그저 잠깐 그러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5일이 넘어가고 마침내 9일째가 되었을 때는 심각해질 수밖에 없었다. 갓 100일 지난 둘째를 아기띠로 안고 한 손엔 첫째의 손을 꼭 잡고서 소아과에도 가고, 한의원에도 갔다. 한의원에서는 애가 장에 열이 많은 체질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최소 3개월은 한약을 먹여야 한다고 했는데, 부른 약값이 엄청났다. 사기를 당하는 것만 같아서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하며 뒤도 안 돌아보고 나왔다.


소아과에서 권해준 대로 물속에서 손가락으로 항문 마사지도 해봤고, 넣는 관장약도 두 차례 써봤다. 하지만 관장을 했을 때만 변을 봤을 뿐, 후에 심한 변비가 왔을 때는 아무것도 소용이 없었다. 첫째는 몹시 초조해하며 시도 때도 없이 커튼 뒤에 숨어서 선 채로 힘을 주고 몸을 부르르 떨곤 했다.


열흘째 되던 날, 마침내 한의원에라도 다시 가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첫째가 드디어 변을 본 것이다! 자기 힘으로 말이다. 너무 기쁘고 감격했던 나는, 즉시 그 기쁨을 다른 사람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미국에 있는 남편은 자고 있을 시간이었다. 첫째를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을 생각해 보니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시어머니였다.


“어머니, 첫째가 드디어 똥을 쌌어요! 열흘 만이에요!"


문자메시지로 글만 보내자니 뭔가 허전했다. 그래도 거기까지만 했어야 했는데... 나는 환희에 가득 차 증거 사진을 첨부했다. 그것의 실물 사진을 말이다. 당시 나는 하루하루 첫째의 대변을 간절히 원하고 있어서 더럽다고 생각하질 못했다. 열흘 만에 그것을 보았을 때는 거의 첫째가 똥을 낳기라도 한 것 같은 심정이었다. 문자를 받은 시어머니께서는 사정을 이해는 했지만, 속으로 “이게 뭔가...”했다고 나중에 웃으며 말씀하셨다.


열흘 만에 변을 본 뒤로, 첫째의 변비는 빠르게 나아졌다. 왜 그런 증상이 나타났던 것인지는 아직도 확실히는 알 수 없다. 지나고 난 뒤에야 심리적인 요인들이 신체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 다만 아이의 정신과 몸이 얼마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처음으로 배웠던 사건이었다. 아, 시어머니께 응가 사진을 보내서는 안 된다는 사실도 말이다.



5월 16일.

이번에는 아빠가 있다! 엄마가 막내를 돌보느라 바빠도, 아빠가 곁에 있었다. 부엌에 서서 요리를 하는 아빠 뒤로 첫째와 둘째가 빙글빙글 돌며 저들끼리 신나게 놀았다. 누구도 혼자가 아니다.



5월 21일.

막내를 거실로 데리고 나오자, 곁에 딱 붙어서 신기한 듯 바라보던 첫째.

조심스럽게 건네보는 다정한 눈인사.



5월 22일.

아직 오빠라는 호칭이 어울리지 않았던 둘째. 마냥 신나 있었다.

집안의 막내 자리를 과연 순순히 동생에게 내어줄 수 있을지...?



5월 25일.

갓난아기일 때 셋 중에 누가 제일 순했는지 말해보라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셋째였다.

잠투정이 적어서 업고 토닥이면 금방 잠들었고, 자다 깨도 바로 엄마를 부르지 않고 아기 침대에서 저 혼자 놀고 있곤 했다. 그래서 친척 어른들은, 막내가 엄마 힘든 것 알아서 순한 거라고 얘기해주시곤 했다.

어른들이 해주시는 덕담은 그런 힘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설사 그것이 사실이 아닐지라도 그렇게 될 거라는 듯한 주문. 그리고 육아라는 일상 속에서 슬며시 똬리를 틀었던 원망에 대하여, 다 알고 있고 결국 다 지나갈 거라는 다독거림.



5월 26일.

엄마가 나보다 얘를 더 많이 쳐다보는 이유가 뭘까?

처음엔 호기심으로 낯선 생명체를 대하듯 하던 둘째는 서서히 동생이 생긴다는 게 어떤 건지 체감하는 중이었다!



5월 27일.

저녁 준비하려는데 식재료가 똑 떨어졌다. 막내를 띠로 업고 형제를 유모차에 태운 채로, 가까운 식재료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 둘째는 벌써 유모차에서 정신없이 잠들었고, 첫째 역시 누우면 바로 잠들 태세였다. 아이들이 잠잠해진 틈을 타 서둘러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 살던 곳은 신도시였다. 셋째를 임신했을 때 동네 엄마로부터 “뭐 좋을 게 있다고 셋이나 낳냐”는 핀잔을 들었을 만큼, 이곳에서 아이 셋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이렇게 셋을 모두 데리고 장이라도 보러 나갈 때면 나도 모르게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게 되었다. 한 번은 장 보러 가는 길에 모르는 여자가 다가와 "정말 이 세 아이들의 엄마냐"며, "어쩌다 셋이나 낳았냐"고 묻기도 했다. 혹시라도 바깥에서 셋 중 한 명이라도 말을 안 들으면, '능력도 안 되면서 셋이나 낳은 진상 엄마'로 보일까 봐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첫째가 유치원에서 견학을 다녀오는 날이었다. 그날은 아이를 직접 데리러 오라는 공지가 있었기에 막내와 둘째를 데리고서 유치원 앞으로 갔다. 그런데 버스에서 내리는 아이를 맞이하는 엄마들 속에서, 아이가 셋인 엄마들이 서너 명 보였다. 엄마들의 꾸밈없는 편안한 옷차림과 맨 얼굴,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태도도 눈에 들어왔다.


이 당시에 내가 살던 신도시에는 영어 유치원만 있고 일반 유치원이 없어서, 나는 가까운 구도심의 유치원으로 아이를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종종 이렇게 유치원에 갈 일이 생겼을 때 그 동네의 엄마들을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는데 신도시와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특히 이유는 모르겠지만 자녀가 셋인 집이 많다는 게 인상 깊었다. 이 동네에서라면 아이 셋 엄마도 눈치 보지 않고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이 동네로의 이사를 결심하게 되었다.



5월 28일.

셋째와 조리원에서 집으로 오고 나서, 한 달간 집안 살림을 봐주시는 이모님을 고용했다. 아침에 9시쯤 출근해서 청소, 빨래, 설거지를 해주시고 4시쯤이면 퇴근하셨다.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하지 않으셨지만, 애들이 장난을 쳐도 화내거나 하지 않고 받아주셨다. 아직 어린이집에 다니지 않던 둘째가 이모님을 좋아했다.



5월 31일.

막내의 첫 유모차 탑승 날. 유모차에 타고서 아파트 내에서 천천히 산책했다. 막내는 울거나 보채지 않고 주변을 살펴보며 바깥공기를 느끼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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