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신의 눈으로 15층으로 구성된 회색빛 아파트를 자세히 들여다봐 주었으면 좋겠다. 카메라 렌즈가 한 곳을 중심으로 확대되듯 많은 층 중에서 13층에 조금이라도 더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다. 그리고 13층의 한 집에서 창문 밖을 다크서클이 내려온 눈으로 응시하는 내가 눈에 띄었으면 좋겠다. 오직 당신에게만 비추었으면 좋겠다. 모두에게 보여주기에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모습이라서.
1월 24일, 도쿄 여행을 떠나기 하루 전날.
나는 여전히 삼십 대, 일본어 프리랜서 번역가, 미혼이다. 지난번 무더운 여름에 도쿄로 여행을 훌쩍 떠났을 때와 거의 변함이 없다. 단, 우리를 둘러싼 날씨는 여름에서 추위 때문에 기동력이 떨어지는 겨울로 바뀌었다. 아, 그렇지. 얼마 전 연애 초기의 불안정함도 설렘으로 모두 잊게 한 솔직하고 장난기 많은 남자는 한 명 생겼다.
프리랜서로 재택근무를 하다가 지칠 때면 거실에 우두커니 서서 13층 창밖 풍경을 바라보곤 했다. 우리 집 아파트 밖을 보면 멀리 아름다운 산들이 보이고, 그 밑에는 아파트와 거대한 헬스장 간판이 있다. 맞은편에서는 평소에 마트가 멀리 있어서 자주 가는 편의점이 눈에 들어온다. 2차선 도로 옆에 자주 걸어 다니는 알록달록한 인도도 보인다. 생활 속에 깊숙이 파고든 건축물과 자연 풍경을 눈에 담자 문득 내일 당장 한국 땅을 떠나 도쿄에 간다는 사실이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까마득히 먼일처럼 느껴졌다.
‘아니, 내일 도쿄 여행을 떠난다고?’
이런 생뚱맞은 생각이 들 만도 한 게, 무려 1월 25일 오전 일곱 시 삼십 분 출국이라는(공항에는 새벽 다섯 시 정도에 도착해야 했다) 냉정한 사실과는 달리 도쿄 여행을 떠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여행 전날까지 무한대로 100m 달리기를 반복하는 사람처럼 쉴 틈 없이 달음질하며 일하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행을 떠나서는 업무 문서의 단 한 글자도 보지 않겠다’는 자신의 여행 모토에 맞추어 본업인 번역을 바삐 해내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감지 못한 머리는 꼬질꼬질하고, 눈 밑에는 둥그렇게 다크서클이 지고, 꼿꼿하게 앉아만 있었더니 허리에서 통증이 느껴지고, 어깨는 다른 사람의 어깨인 듯 불편했다. 신체뿐만이 아니었다. 좋게도, 나쁘게도 이전에는 느끼지 못한 다채로운 감정을 느낄 일이 많아져 정서적으로도 안정되지 못하고 마음이 늘 두둥실 떠 있었다.
거실의 네모난 회색 시계를 보니 시침이 오후 열한 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이제 나는 새벽 다섯 시에 출발할 때까지 도쿄 여행 계획을 짜고, 전혀 짐을 싸지 못했으니 캐리어에 필요한 물건들을 채워 넣고, 번역 업무 두 개를 마지막으로 정리해서 제출해야 했다. 많은 사람이 잠이 든 시간에 소화해야 할 몰아치는 일들에 실성한 듯 웃음이 나왔다.
까무룩 정신을 잃고 다 포기할 듯했지만 그럼에도 괜찮았다. 아니, 이렇게라도 여행을 하여야 한다는 믿음이 한결같았다. 이렇게 저질러놓지 않으면 쳇바퀴처럼 바쁘게 흘러가는 인생에서 달음박질만 하느라 절대 이곳에서 떠나지 못한다.
바쁜 우리는 이렇게라도 저질러놓아야 혼자 여행을 떠나고, 우리는 그제야 자신을 살릴 새로운 기회를 스스로 얻을 수 있다.
우리의 나 홀로 여행 결정은 언제나 옳다.
바쁜 당신에게도 위의 말만은 단호히 전하고 싶다. 당신도 부디 공감하기를 바라며...
요 며칠 바쁜 나날을 보내며 결국 왼쪽 코에서 코피가 주르륵 흘렀다. 콧물인가 하여 집게손가락을 살짝 대보았더니 선명한 붉은색이었다. 흠칫했다. 꽤 오래전에 예능 <라디오 스타>에서 가수 현아가 하루에 열 시간 이상 무대 연습을 한 후 코피가 몇 번 터지고 나서야 ‘지금 제대로 하고 있는 게 맞구나’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는데, 일의 강도는 다르겠지만 나 역시 일을 과하게 하다 보면 가끔 코피가 터지곤 했다.
그러나 코피가 터지면 잘하고 있다는 생각보다는 자신의 컨디션 저하가 급작스럽게 걱정되기 시작하면서 무언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무언가 변화가 필요했다.
그래서 혼자 도쿄로 향했다.
그리고 도쿄 여행에서 돌아온 후, 다크서클에 초라하게 반쪽이 된 얼굴에서 포동포동하게 살이 올라 빛깔 좋은 얼굴로 바뀐 자신을 보며 오히려 다이어트를 생각하게 된다.
지난여름에 이어 일본 엔화의 환율은 여전히 바닥을 치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일본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갈수록 늘어났다. 곧 다가올 설 연휴 해외여행 트렌드 분석에서 일본행 항공 예약률이 37%로 가장 높게 나왔으니 일본 여행의 인기는 쉬이 가라앉지 않을 것이다(※).
공항에 들어서자 아침 일곱 시 이전임에도 여행을 떠나려는 수많은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한 걸음 내디딜 때 세 사람 정도가 지나치는 인파에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지금 새벽 여섯 시가 맞나? 1월에 맞이한 새벽 공항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활기를 더해가고 있었다. 지난여름에는 사람이 이토록 많지 않았다. 1월에 낮은 환율과 더불어 학생들도 방학을 맞이하며 더욱 사람이 많아졌으리라.
북적이는 사람들이 자아내는 들뜬 풍경과 달리 나는 조금 안타까운 일을 겪었다.
부산 김해 공항 라운지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는데, 예정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여자들이 한 달에 한 번 겪는 그날이 시작되었다.
그날이 나를 찾아오면서 하코네의 따뜻한 온천에 몸을 담그고 피로를 날리려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아쉬운 마음에 어깨가 절로 축 처졌다.
게다가, 앞서 언급했듯 이번 여행 때 공항에는 사람이 무서울 정도로 많았다.
게다가, 지난여름에 이어 항공기는 여전히 지연이었고 결국 미리 세운 계획은 조금씩 틀어졌다.
아직 비행기에 발을 디디지도 못했거늘 자신의 생각과는 사뭇 다르게 여행이 흘러가서 조금 서글펐지만(갑자기 그날이 시작되어 예민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유 모를 확신은 있었다. '이번 도쿄 여행은 반드시 즐거울 것이다. 혼자 하는 여행은 무조건 뜻깊다'라는 확신. 이전 글에도 쓴 적이 있듯이 먹음직스러운 재료를 차곡차곡 쌓고 달콤 짭짤한 소스를 뿌려 완성하는 히로시마식 오코노미야키처럼, 혹여나 여행하다 실패하거나 허탕을 쳐도 바로 또 다른 명소와 맛집을 가거나 인생 사진을 찍으며 좋은 추억을 차곡차곡 쌓아서 행복한 여행을 완성할 테니까 말이다.
모바일 탑승권과 여권을 검사한 후 비행기로 향하는 공항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 안에는 둘 다 안경을 낀 커플, 들뜬 표정으로 떠드는 아이들과 이를 지켜보는 가족, 설레는 표정으로 상기되어 있는 무리가 대부분이었다. 이들 사이에서 나와 같이 홀로 웃음 짓고 있는 관광객이 마치 케이크에 꽂힌 예쁜 데코레이션처럼 당당하게 서 있었다.
1월 겨울 도쿄 여행을 위해 공항에 오기 전 해야 할 업무를 제대로 끝냈다. 정리해야 할 부분은 최선을 다해 마무리 지었다. 그 외에 포기할 부분은 포기했다.
불과 두, 세 시간 후면 도쿄에 발붙이고 있을 자신이 아직 상상이 안 되고 무척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만, 철저히 혼자가 되어 도쿄로 도망갈 테다.
사람들로 붐비는 김해 공항.
2.낮의 도쿄 센소지와 고**
도쿄 아사쿠사 숙소 근처에는 세 번 방문한 유명 관광지 '센소지'가 있었다. 낮에는 센소지 앞의 나카미세도리에서 두둑이 쌓아두고 파는 닌교야키(팥이 들어간 빵)보다 많아 보이는 인파들이 이 관광지를 오가고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도록 요리조리 피하며 걷고 있는데, 반대편에서 옅은 파랑 빛깔 기모노를 입은 분위기 있는 여자가 아이의 손을 잡고 걸어오고 있었다. 기모노 차림이 아주 잘 어울려 일본인인가 했더니 한국어로 손을 잡고 있던 아이에게 말을 했다. 센소지로 가기 위한 입구인 '가미나리몬'을 들어와 '나카미세도리'를 거쳐 마지막 정점인 센소지에 이르기까지, 일본어로 쓰인 상점의 간판 등 눈에 보이는 표면적인 물건들만 일본 같았을 뿐 사람은 한국인을 포함한 외국인만 보였다.
원래 센소지가 관광객 없이는 성립이 안 될 정도로 외국인에게 친숙한 명소다. 도쿄 여행의 시작점으로도 여겨지는 곳이다 보니 수많은 외국인이 시간을 들여 찾아온다.
자신과 같은 한국인이 더 많이 보이는 풍경에 마음속 불안함이 사라지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어쩌면 해외까지 왔는데 외국인만 그득 찬 풍경에 낙심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점심을 먹을 가게와 가까워 센소지를 잠시 거쳐 가던 나는 후자에 속했다. 하지만 외국인만 많고 소란스러워도 괜찮았다. ‘그럴 수도 있다’ 싶었다.
머릿속에 어찌 보면 어이없어질 정도로 확고한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당장 완벽하게 만족스럽지 않더라도 일본 도쿄를여행하며 흘러가다 보면 어느 순간 가슴속에 선명하게 남는 사람, 풍경, 장면이 나타날 거라고.
“그럴 수도 있지.”
센소지에 있을 때 입에서 나온 이 말은 상황을 단번에 이해하게 만드는 마법의 말이자 확신이 담긴 문장이었다. 실망한 기분을 스스로 위로하고자 되뇐 말은 결코 아니었다. 얼마 후 분명 놀라울 정도로 좋은 장면이 나타날 것이라는 도쿄를 향한 믿음에서 우러나온 생각이었다.
낮의 센소지. 외국인 관광객을 빼놓을 수 없다.
센소지에서 몇 발짝 벗어나자 인파가 눈에 띄게 줄었다. 센소지 근처 우동집 고**(小*)까지 가는 길에는 연한 주황빛 햇살이 가득했다.
옷매무새를 살짝 여미게 되는 조금 쌀쌀한 날씨. 갑자기 인파가 줄어들어 적응이 안 될 정도로 조용한 신호등 주변. 여름의 도쿄보다 짙지만 깨끗하고 푸른 하늘. 주황빛 햇살을 받은 1차선 도로 위를 여유롭게 지나가는 알록달록한 순환 버스 메구린(めぐりん). 일본에는 특유의 그림 한 폭처럼 맑은 하늘과 조용히 내리쬐는 햇살, 쥐 죽은 듯한 조용함이 만들어내는 무척이나 매력적인 분위기가 있다. 오죽하면 목적지인 우동 가게에서 맛본 음식보다 가게까지 가는 길이 더욱 마음에 들었을 정도다.
도쿄 센소지 주변 풍경.
우동집 고**는 1차선 도로에서 더 한적한 골목으로 들어갔을 때 드디어 찾을 수 있었다. 정갈하게 빨아서 걸어놓은 행주들 옆에 낡은 나무로 된 입간판이 있고 뒤에는 자그마한 노란 문이 보였다.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가자 아담한 1자형 실내가 눈에 들어왔다.
일하는 사람 세 명이 모두 여자였다. 평소에 남자 한 명 없이 여자 세 명이 합심하여 일하는 모습을 자주 본 적은 없던지라, 여자들을 향한 기쁜 관심이 생겨 테이블석이 아닌 그녀들의 요리하는 모습이 잘 보이는 카운터석에 앉아 냉우동인 붓카케 우동이 아닌 따뜻한 카케 우동을 주문했다. 역시 1월 겨울에 도쿄에서 냉우동은 못 시키겠더라.
그녀들은 사소한 말 하나하나에 웃음기를 담아 서로에게 건넸고 장난기 어린 말투로 얘기하면서도 서로가 분담한 요리와 서빙, 청소 등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때는 제대로 씩씩하게 대답하며 소통했다.
햇살이 가게 안까지 들어온 것처럼 주황빛 불빛이 가게를 밝혔고, 마음이 차분해지는 불빛 아래에 니혼슈 술병과 화분 등으로 꾸며놓은 내부 인테리어가 눈에 띄었다. 가게 규모는 작지만 깔끔하게 청소해 놓아서 모든 물건이 새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곳에서의 행복은 여기가 끝이었나 보다. 기대를 가지고 주문한 카케 우동을 입 안에 넣자 고개를 갸웃했다. 일본 음식이 원래 짜기는 하지만 이 우동 국물은 짠 음식을 좋아하는 나에게도 유독 짜게 느껴졌다. 면발은 탱탱하지 않고 툭, 툭 잘 끊어졌다.
분명 맛집이라는 글을 인터넷에서 봤는데 어떻게 된 걸까? 얼마 후 한 명씩 들어오는 손님들의 주문 목록을 엿듣고 어렴풋이 이유를 알았다. 손님들이 된장이나 카레, 붓카케 우동을 주로 주문하는 걸 보니 전체가 아닌 특정 음식이 특별히 맛있는 듯했다. 내가 주문한 카케 우동은 특별하지는 않았던 것이고. 생각해 보니 검색했을 때 ‘면발이 미쳤다’라고 적혀 있던 글에서도 내가 주문한 카케 우동이 아닌 붓카케 우동이 등장했었다. 전지적 김연경(나) 시점에서 맛집이 아니었고 좋은 감상이 떠오르지 않았기에 글을 쓸 때도 전체 가게 이름을 적지 않고 고**로 일부를 가렸다.
카케 우동. 튀김의 맛은 훌륭했다.
도쿄 겨울 여행의 첫 끼를 책임진 우동 가게에서는 완벽한 행운이 따르지 않았다.비록 지나던 길이기는 했지만 센소지에도 사람이 너무 많아서 완벽하게 즐기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이번 도쿄 여행은 반드시 즐거울 것이다. 혼자 하는 여행에 실패는 없다’는 무모해 보이기까지 하는 자신감에 가득 찬 생각이 무작정 들었다. 오히려 실망감은커녕 앞으로 어떠한 일들이 텅 빈 가슴을 꽉 채워줄지 기대감이 차올랐다.
이는 도쿄 여행, 아니 해외여행을 향한 믿음이었다. 지난여름, 밤의 센소지를 돌아보며 불완전함의 미학을 조금이나마 체득한 나다. 특히 해외여행은 완전하지 않고 불완전해도 아주 행복하고 가슴이 설렌다. 한국 땅을 떠나 낯선 곳에 온 것만으로도 해방감이 든다.
비단 여행뿐만 아니라, 어떠한 일이든 여행하듯이 대할 수 있다면 모든 경험의 조각들이 더 즐겁고 정답게 느껴지지 않을까?
우동 가게 앞.
사람이 가득한 낮의 센소지. 금발 머리 남자 외국인 옆에 서서 서투르게 오미쿠지(おみくじ、제비를 뽑아 자신의 길흉을 점치는 것)를 해보았다. 결과는 가장 좋은 대길(大吉)이었다. 내용을 읽어 보니 이러했다.
<대길>
희망: 이루어질 것입니다.
병: 나을 것입니다.
…
여행: 좋을 것입니다.
오미쿠지의 결과가 좋아 배시시 웃으며 센소지를 걸어 나오다가, 산처럼 쌓여 있는 빵, 닌교야키를 하나 샀다. 투명 비닐에 쌓여 있는 닌교야키를 손에 쥐자마자 바로 따뜻함이 느껴졌다. 관광객을 대상으로 판매하는 물건이라도 아침에 대량으로 만들어두지 않고 금방 만들었나 보다. 괜스레 기분이 좋아져 바로 비닐을 뜯어서 한 입 베어 물자 부드러운 빵 안에 잘게 으깨서 넣은 달콤한 팥 맛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