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기명 Feb 25. 2022

늦잠의 하루

 휴가 때 뭘 하고 싶냐는 말에 늦잠이라 답했다.


 꾸욱 닫힌 창문의 빈틈을 어떻게 찾았는지, 틈새 사이로 굳이 비집고 들어오는 새벽 공기. 일 나갈 시간이라고 눈치 없이 말한다. 오늘은 일을 안 가니까. 새벽을 머금은 찬 공기를 무시할 수 있다. 이불을 뒤척이며 낸 부스스한 소리를 모닝콜로 대신하는 늦은 아침. 일어나서 시간을 보지 않고 여유롭게 기지개를 펼 수 있는 그런 아침. 하품을 더 오래 할 수 있는, 10분만 더 자겠다는 옹졸한 타협 대신 오후에 일어나겠다는 비장한 포부를 품을 수 있는 아침. 늦잠을 맞이한 아침이다.


 여유라는 잔상을 오래 간직하고 싶다. 허리가 뻐근할 때까지 침대에 누워있다가 샤워할 준비를 한다. 5분 내로 씻어야 하는 평일과 충분히 대비되게 여유 그 자체인 올드팝 플레이리스트를 튼다. 샤워기가 내뿜는 물 위의 연기가 하얗게 짙어질 때까지 기다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흘러내리는 물줄기. 가만히 숨을 멈춰 뜨거운 여유를 적신다. 늦잠을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이다.


 아침과 점심 사이, 인적 드문 동네 카페 창가에 앉는다. 나른한 햇빛을 조명 삼아 책을 읽는다. 마음이 가는 문장에 줄을 긋는다. 연필을 내려놓고 커피를 마신다. 다시 책을 읽는다. 낯선 자연광에 눈이 피로해질 때쯤이 되면, 한적했던 카페에 꽤 사람이 모여있다. 줄을 긋는 연필 소리가 묻힐 때가 되면 책을 덮고 밀린 카톡을 읽는다. 이렇게 늦잠의 잔상이 마무리된다.


 티끌만 한 휴가만큼 티끌만 한 늦잠의 잔상. 찰나의 순간이 더 기억에 남듯 여유롭게 즐겼던 늦잠이 그립다. 주말이 머지않았다. 약속이 없는 토요일에 늦잠이랑 약속을 잡는다.

이전 16화 시작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