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받은 응원과 위로를 나도 나누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작이 막막한 청년 사업가, 단조로운 일상을 멈추고 싶은 사람 그리고 사람에게 상처받은 사람들에게 어떻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 그런 고민들을 하던 즈음에 운명처럼 선물을 받았다. 책 선물은 받아 본 적이 없었는데, 신기하게 그때쯤 주변 지인들이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책을 선물해 주었다. 한 직장 동료는 연말에 서점에 갔다가 내가 떠오른 책이라며 '안녕, 소중한 사람'이라는 책을 한 권 주었다. 서로 엄청 끈끈한 사이는 아니지만 툭 던진 말들이 깊은 위로가 되는 동료였다. 이미 잘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나답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과 함께 책을 받았다. 사실 쑥스럽기도 해서 멋쩍게 넘겼지만 책 제목만 보고도 위로가 되었던 그런 연말이었다. 그 후로도 여행을 다녀와서 내가 생각났다며 책을 선물해 준 지인도 있었고, 서점에 갈 때마다 내가 생각나는 책을 찍어주는 친구도 있었다. 동생이 힘들 때 보라며 어디선가 계속 힐링 에세이를 가져오기도 했다.
잠들기 전 포근한 이불을 덮고 책을 읽으며 잔잔한 위로를 받았다. 조용한 겨울밤이 주는 효과인지, 한참 힘들었을 때라 그랬는지 뻔한 위로의 문구조차도 마음을 크게 울렸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쓴 글로 누군가에게 힘이 돼주고 싶다. 항상 글을 쓰는 것에 대한 갈증도 있지 않았던가. 그렇게 첫 번째, 두 번째 부캐를 거쳐 책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들려주고 싶은 얘기는 넘쳐났다. 창업을 하면서 있었던 수많은 일들, 두통을 유발하는 진상, 직장인의 힘든 삶, 어떻게 극복하고 있는지 담은 글을 쓰고 싶었다. 이 모든 것들을 담은 큰 주제는 직장인의 단조로운 일상에서 벗어난 부캐들의 삶이었다. 각 부캐들은 만나는 사람도 다르고 활동하는 공간도 달랐다.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도 다양해졌다. '각 부캐들의 성장 일지를 담으면 어떨까?'라는 큰 주제를 잡았고 지금까지 겪은 다양한 이야기들을 적어 내려갔다.
블로그에 어느 정도 글을 작성했을 때쯤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책을 쓰고 출판을 한다는 건 공대생에게 너무 낯선 분야였다. 잘 모르겠을 때는 역시 구글 검색창에 '책 출판하는 법'을 검색했다. 독립 출판, POD, 소량 출판 등 모르는 단어와 각종 광고가 쏟아져 나왔다. 아무리 읽고 또 읽어도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이렇게 무작정 검색해서 찾아보는 건 무리였다. 게다가 글을 잘 쓰고 있는 건지도 의문이 들었다. 이런 고민을 이야기하자 친구가 글쓰기 프로그램을 하나 추천해 주었다.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여 글을 쓰고, 서로의 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작가님께 피드백도 받을 수 있는 수업이었다. 게다가 일정 기간이 지나면 10명의 글을 하나로 모아 직접 출판을 해볼 수도 있었다. 바로 사전 예약을 신청하고 참여할 수 있는 날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두근거리는 첫 수업이 시작됐다. 앞으로 함께할 팀원들과 작가님 앞에서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을 가졌다. 소개를 할 때 어떤 글을 쓰고 싶은지 간단하게 말해달라고 하셨는데, 첫 시간이라 그런지 다들 뚜렷한 주제가 있지는 않았다. 작가님은 아직 시작하는 단계니 그럴 수 있다며 개요를 짜는 법을 가르쳐주셨다. 무작정 쓰기 시작한 글을 기승전결에 맞게 다듬고 새롭게 순서를 배치했다. 이렇게 하니 읽기도 훨씬 수월해지고 흐름도 자연스러웠다. 수업 때는 주로 서로의 글을 읽고 합평하는 시간을 가졌다. 처음에는 누가 내 글을 보는 게 쑥스럽기도 하고 다른 사람의 글에 피드백을 하기 뻘쭘했다. '괜히 잘못 말을 했다가 서로 기분이 상하면 어쩌지?'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서로의 피드백이 쌓여갈수록 글의 깊이가 달라지는 게 확연하게 보였다. 얇디얇았던 원고가 서로의 피드백을 통해 풍성해졌다. 모두가 똑같이 느낀 건지 다들 점점 더 적극적으로 합평에 참여했다.
작가님의 소중한 피드백도 하나하나 메모해 두었다. 글을 쓰는 걸 따로 배운 적이 없어서인지 생각보다 문법적인 오류가 많았다. 한 문장에 쉼표를 남발하기도 했고 블로그에 글을 적듯이 문단을 아주 짧게 끊어버리기도 했다. 이러한 좋지 않은 글쓰기 습관들을 고쳐나갔다. 게다가 블로그에 창업 일지를 쓸 때는 정보 전달에 초점을 맞춰 쓰다 보니 글에 감정 표현이 많이 없었다. 글을 좀 더 생생하고 입체적으로 만들어 줄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렇게 나의 생각과 묘사를 채워 넣는 법도 배울 수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묘사 수업은 문장을 다르게 표현하기였다. 예시로 '현 위치에서 신논현역까지는 3분 거리이다.'라는 문장이 주어졌다. 그러면 그 문장을 '지금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면서 걸어가면, 노래가 끝날 때쯤 신논현역에 도착한다.'로 풍성하게 바꿔보는 것이다. 여러 예시 문장을 가지고 연습하다 보니 묘사 실력이 많이 늘었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책 한 권을 완성하기 위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작가를 꿈꾸는 부캐 활동에 푹 빠졌다. 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해서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 다시 봄이 올 때까지 글을 다듬고 완성시켰다. 지하철을 타고 이동할 때도, 신호를 기다리다가도,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쓰고 싶은 내용이 떠오르면 바로 메모장을 켜서 글을 썼다. 같은 문장이라도 마음에 들 때까지 열 번, 스무 번씩 고치고 다듬었다.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감정을 그대로 전달하고 싶어서 글 속에 꾹꾹 눌러 담았다. 그렇게 고치고, 쓰고, 지우고, 쓰고를 반복하며 부캐들의 이야기가 완성됐다. 정말 오로지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날이 갈수록 부캐들은 쑥쑥 성장했다. '직장인 나'는 더 큰 회사로 이직을 했고, '블로거 나'는 블로그에 포스팅 한 글이 네이버 메인에 소개되기도 했다. '사장님 나'는 초보 사장에서 조금 더 능숙한 대처 능력을 갖추었다. 모두 좀 더 깊이 있는 캐릭터가 되었다. 이렇게 세월은 점점 흐르고 계속해서 나의 부캐가 늘어간다면 어떨까? 모든 부캐들의 이야기를 담은 글을 쓴다면 책은 점점 더 두꺼워지겠지. 의미 없이 두껍기만 한 책이 아니라 한 페이지, 한 문장, 단어 하나까지 의미 있는 그런 책으로 완성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