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책을 처음 읽는 것처럼
새로운 책이 도착했다. (또 새로운 책도 오고 있는 중이다.) 장롱 위칸이 무너져 내리지 않을 만큼만 넣어야 하는데.... 생각보다 가구가 튼튼하지 않아 보여 걱정이다.
이번에 만난 책은 철학자의 삶을 그린 책이라고 한다. 무려 니체에 관한 책이다. 세상에. 무식해서 공부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듣던 아이가 철학책이라니. 큐블리케이션 된 책들을 읽다 보니 별별 분야를 다 읽어본다. 늦었지만 무식의 굴레에서 벗어나 보려 노력 중이다.
부끄럽지만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니체가 쓴 책인지도 몰랐다. 차라투스트라라는 사람이 따로 있는 줄 알았다. 이런 내가 철학책을 무사히 읽을 수 있을까? 두려움 섞인 설렘으로 책을 꺼내 든다. 표지의 빨간색이 마음에 쏙 든다. 열정을 불태우며 즐겁게 읽을 것 같은 매력적인 색감이다. 그러고 보니 표지에 저 남자가 니체구나.
책장을 한 장 넘기는데 손에 닿는 느낌이 너무 좋아서 책을 다시 한번 집어 들었다. '이 색다른 종이의 느낌은 뭐지?' <유러피언>처럼 찰랑이는 재질인 것 같지만 조금 더 두께감은 있고 조금 더 부드럽게 매끈한 재질이다. 그저 '흰 바탕은 종이요 검은색은 글씨네.' 할 게 아니었다. 600페이지가 넘는 책이지만 적당히 무겁고 종이는 적당히 얇다. 너무 얇아서 아슬아슬하지도 않다. 보통 책이 두꺼워지면 종이의 잘린 면, 책장을 넘기는 쪽이 다소 거칠거나 날카롭다. 하나 이 책은 단면도 사포질을 해 둔 듯 매끈하다. 독자의 여러 가지 편의성을 고려한 출판사의 배려가 느껴져서 더욱 책에 정이 간다.
번역을 맡아주신 분의 이름이 낯익다. 내가 번역자의 이름을 기억할 정도로 똑똑하진 않는데... 했더니 최근에 읽은 두 권의 번역을 맡으셨던 분이라 그랬나 보다. 괜히 더 친근하게 느껴져서 번역된 책 중 다른 책들도 찾아봤다. 장르를 넘나드는 번역을 하신 분이다. 어렵게만 느껴졌던 그리스 로마 신화가 같은 분의 번역으로 <처음 만나는 그리스 로마 신회>가 있는 걸 본다. 다음에 신화를 도전할 때는 번역가를 믿고 이 책으로 선택하는 것도 괜찮을 듯하다.
닷새만에 아침 명상을 했더니 머릿속이 부글부글 가득 차 있음을 느낀다. 겨우 하루에 십 분인데 뭐가 그리 차이가 나겠어했지만 그게 아닌가 보다. 굴뚝에서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생각은 끊임없이 솟아올라 머리를 가득 채우고 터질 듯이 부풀리고 있었다. 오늘은 그저 인지하고 바라보는 것에 그친 명상이라 생각했는데, 의외의 곳에서 명상은 힘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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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은 명상을 끝내면 자리를 정리하고 앉아 테이블을 펴고 책을 읽는다. 평소와 다르게 테이블이 준비되지 않아 그냥 차 한 잔을 들고 바닥에 앉았다. 쪼그리고 자세를 잡고 보니 어릴 때 엄마랑 둘이 바닥에 주저앉아 책 보던 때가 생각났다. 등을 벽에 기대고 앉아 양 무릎을 세워 그 위에 책을 올려두면 제법 오랜 시간 앉아서 책을 읽어도 목과 팔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 잠시 추억에 잠기고 보니 책 읽는 행위 자체의 즐거움을 한 동안 잊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무슨 이유였을까? 왜 이렇게 쫓기듯 책을 읽고 있었던 걸까? 좋아서 하는 독서임이 틀림없다.(누가 시켜서 하는 거였음 예전에 그만뒀을 거다.) 아침을 책과 함께 여는 것이 행복해서 이 시간을 택했다. 그 날의 기분에 따라 읽고 싶은 책을 고르는 재미도 있어 책장에는 늘 읽을 수 있는 다양한 책을 구비해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것들과 상관없이 완주가 목적인 것처럼, 멈출 수 없는 컨베이어 벨트 위에 놓인 기계처럼 책을 가져오고 읽고 쓰고 다 읽었으니 다음, 이런 패턴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럴 이유가 어디에도 없는데 말이다.
어떤 분들은 서평 속에 책을 처음 보았을 때 설렘, 촉감, 인쇄 상태, 책 넘김 등의 느낌을 세밀하게 남겨주시는 경우가 있다. 다 읽은 책이었지만 그 서평을 보고 책을 다시 집어 든 날도 있었다. 그러면서도 한 번도 책을 처음 만나는 '지금'에 충실하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순간에 집중하고 현재에 존재하는 것은 어쩌면 생각보다 훨씬 쉽지만 훨씬 어려운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명상의 효과인지, 그냥 날이 좋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니체는 조금 색다르게 만나게 되었다. 그 영향으로 읽는 내내 바그너를 찾아 듣고, 뮌헨의 거리를 찾아보느라 정작 책은 몇 장 읽지도 못했지만 말이다. 뭐 조금 늦게 읽으면 어떤가. 읽는 내내 즐거움이 가득하다면 그것 또한 책 읽는 이유로 충분하지 않을까? 내 인생 처음으로 만나는 니체는 어떤 색과 느낌으로 남게 될지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