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게 된 이유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사람들이 있다. 음악적 재능이 있어서 아름다운 선율을 알고 그대로 따라 하거나 또는 그러한 선율을 창조하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나는 후천적으로 글을 쓰게 됐다. 내 아픔이, 서러움들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다. 휘몰아치는 고통과 숙명은 나를 격분하게 만들어 무어로라도 표출하지 않으면 나는 그 자리에서 응집되어 폭발했을지도 모른다. 고통은 글을 토해내게 했다.
내가 처음 시를 쓰게 된 것은 나무를 보면서였다. 집 앞에 있는 평범한 나무를 보며 나는 왜 그렇지 못할까, 저 단단한 나무처럼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나무는 상처가 많아 보였다. 어쩐지 나와 비슷해 보였다. 동질감에 그의 입장을 생각했다. 뿌리 깊게 뻗기 위하여 나무는 얼마나 많은 성장통을 견디어 왔을까. 나는 그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나무를 보면서 위안을 얻었다. 그렇게 나는 그대를 닮아간다.
2019.9.14 <나무>
이 시를 썼을 때 어떤 이는 너무 슬프다, 어떤 이는 정말 희망적이다 각각 바라보는 시야가 다양했다. 나 같은 수준에서 가지각색의 감상평을 듣다 보니 시의 매력에 더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시는 그야말로 나에게 치유의 노래였다. 예전에 어떤 이가 그랬다. "예지님의 글은 하얀 장미 같아요. 글을 읽기만 하는 사람은 그렇게 아파보지 않았을 수 있어요. 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은 반드시 아파 본 사람일 거예요" 시간이 지나도 뇌리에서 잊히지 않았다. 아파본 사람만이 글을 쓴다. 아닌 사람이 있든 없든 나는 그러하다. 아프기 때문에, 아파봤기 때문에 글을 쓴다. 살기 위해서 글을 쓴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나를 사랑하기 어렵다. 그러다 보면 잘 살아지는 날도 오겠지. 나를 온전히 사랑하는 날이 오겠지. 내 안에 갇힌 작은 새를 자유롭게 해주고 싶었다.
처음 브런치를 시작했을 때는 객기만 있었다. 내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다는 혈기. 그러나 사실은 두려웠다. 나 스스로 웅덩이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허우적대고 있었기에 두려웠다. 천천히 자유롭게 한두 개씩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싶은 사람인지를 알았다. 어느덧 나는 많이 단단해졌다. 나무와 같은 사람이 되었다.
이제는 작은 새를 놓아줄 때가 된 것 같다. 나의 아집과 상처로 꽁꽁 묶어두는 게 아니라 이젠 자유롭고 힘차게 날아가서 원하는 삶을 살라고 그래서 나에게 세상에게 더 큰 희망을 주라고 말이다. 쓸데없는 혈기가 아닌 나도 당신들에게 힘을 줄 용기가 생겼다. 나 혼자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들의 문제임을 세상에 외치고 싶다. 그렇기에 당신도 할 수 있다. 내가 어디까지, 어떠한 지독하고 깊은 늪까지 빠졌었는지 알려주고 싶다. 아무도 모르는 이 이야기를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그랬을 때, 당신도 그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 테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이 구원할 수 있다는 것을 진정으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