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의 행정절차와 그 외
홍콩에서 살기 위해서는 여유 혹은 느림에 익숙해져야 했다. 여행을 가거나 하면 한국의 신속한 서비스에 이미 길들여졌구나 싶은 때가 종종 있는데 산다는 것은 그 기다림의 기간이 좀 더 길어진다는 것을 의미했다. 홍콩에서 집을 구하고, 계좌를 만들고, 신용카드를 발급받는 기간 내내 오래 기다리다 보니 곧 ‘천천히 가는 것’에도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처음 이 ‘느림’을 마주한 건 첫 집을 구할 때였다. 부동산 담당자와 집을 다 둘러보고 기본적인 조건 협의를 마쳤는데, 한 시간을 기다려도 집주인이 오지를 않는 것이었다. 도착해서도 얼마나 깐깐히 협의를 진행하는지 분명 집은 오전에 봤는데 계약을 끝내니 오후가 한창 지나고 있었다.
그다음은 은행. 은행은 정말 정말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을 정도로 길고 긴 여정이었다. 회사 바로 앞 오피스에 갔더니 대기표를 뽑으라더니 한 30분 뒤에 오늘은 고객이 많아 업무가 어려울 것 같다며 다음에 다시 오라는 게 아니겠는가? 정확한 시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땐 분명 한창 운영시간 중이었는데, 그 어느 지점엘 전화해도 업무가 가능하다는 곳은 없었다.
그렇게 거치고 거쳐 본사까지 찾아가야 했고, 다행히 본사에서는 약 2-3시간의 기다림 끝에 계좌 발급이 완료되었다. 물론 그 후로도 카드는 약 한 달이 지나서야 받을 수 있었다.
센트럴에 위치한 회사에서 미팅을 진행하면 종종 미팅 시간에 조금씩 늦게 오시는 경우도 있었는데, 홍콩에서는 지하철의 고장이나 교통 상황이 좋지 않은 경우가 많아 조금 늦는 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고 했다. 우리는 이를 두고 '홍콩 타임'이라 부르기도 했다.
그 외에도 ATM 기계를 통해야 하는 송금, 직접 방문하여 서류를 제출해야 하는 관공서 시스템 등 기다려야 하는 일이 수두룩했다.
모든 게 그러하듯 나쁜 면만 있지는 않았다. 시간이 걸리는 서비스 덕에 중간중간 마음에 여유가 생겼다.
일주일은 기본이고 상황에 따라 더 걸리는 국제 택배는 오히려 설렘을 증폭시켰고, 긴 신용카드 발급 기간은 갖고 있는 카드를 더 잘 관리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사 전에는 미리 이케아에 들러 배송일을 지정해 두는 계획성을 갖게 해 주었다.
또, 바쁘기만 했던 출퇴근 길에 잠시 사진을 찍으며 주위도 둘러보고, 저녁을 즐기는 근처 직장인들도 구경하며 홍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왠지 그 여유로움 덕에 홍콩을 더 잘 구경할 수 있었다.
하루의 마지막에 타는 스타페리는 더워도 그저 낭만적이었고, 홍콩섬에서 이동할 땐 꼭 트램을 타곤 했다. 가격도 지하철에 비해 훨씬 저렴하니 시간과 마음의 여유만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무덥고 습한 여름에도 차분히 페리를 기다렸다 맞는 바람에 잠시 더위를 식혀도 보고, 퇴근 후 해피아워의 매력을 느껴보면서 여유를 느끼기 시작했다.
약 2년 반동안 당연하게 출근하면 화장실 갈 틈도 없이 바쁘던 곳에서 뛰쳐나온 지 약 한 달 남짓 지나면서부터 깨닫기 시작한 ‘느림의 미학’이었다. 그 이후에야 비로소 다시 사계절의 변화를, 나의 속마음을 알아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