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음 속에 갇힌 슬픔

40대, 다시 피어나는 삶의 기록1

by 쌀방언니

아빠는 장례식장이 있는 병원으로 옮겨졌고, 서울에 사는 큰오빠가 내려오기 전까지 작은오빠와 함께 장례준비를 했다.

선택하고 결정할 것들이 왜이리도 많은지. 모든 결정을 혼자서 내릴 수 없었기에 나는 전화통에 불이 나도록 오빠랑 통화를 하고, 작은 오빠랑 의논하며 장례식 절차를 하나씩 준비해 나갔다.


준비한 영정 사진이 있냐는 물음에 나는 젊은 시절 아빠의 증명사진을 꺼내어 건넸다.

집에서 병원으로 올때 미리 찍어둔 영정 사진을 챙기려고 보니, 분명히 방안에 있었던 사진이 흔적도 없이 감쪽같이 사라져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그리 큰 방도 아닌데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건지? 찾는 걸 포기하고 급하게 챙겨온 것이 엄마가 가지고 있던 아빠의 이 젊은 시절의 증명사진이다.


엄마는 이 사진이 더 마음에 든다고 한다.

사진 속 아빠는 나보다 훨씬 나이가 어려보였다. 그래서 그런지 아빠의 장례식장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아빠의 마지막을 함께 하지 못했다는 절절한 슬픔보다 장례식을 무사히 잘 치뤄내야겠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장례를 준비하며 분주하게 움직이는 와중에도 나는 힐끔힐끔 아빠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역시 슬픔 앞에 묵직한 책임감이 먼저 자리잡았다.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동안 우리는 각자 맡은 일을 처리했다.

나는 장례식장의 전반적인 것을 담당했다. 음식이 떨어지면 주문을 하고 손님이 오면 안내를 하고, 식사를 냈다.

우리집 아들은 신발정리를 맡았고 그 일을 꽤 잘 해냈다.

손님을 치르는 중간중간 나는 일의 진행사항을 오빠와 언니에게 알렸다. 대개 더 주문한 음식은 무엇이고, 도우미 분들의 퇴근 시간은 언제이며, 담당자가 전하고 갔던 말, 등에 대한 것이었다.




아빠의 장례식에는 울음이 없었다.

울음 대신 웃음이 있었다.

장례식장의 분위기는 밝았다.

한 지인이 식사를 하며 의아한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종교때문인가? 이렇게 밝은 장례식장은 처음 봐."

"종교는 아니고, 우리집 분위기겠지. 마지막을 슬플게 보내드리고 싶지 않은 마음."

"이런 분위기 너무 좋다. 밝아서 좋아."

"슬프지 않은 건 아니지만, 웃으며 보내드리면 좋잖아."

"그래, 그럴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지."


엄마는 손님이 오고가는 동안 상주를 위해 마련된 안쪽 방에 누워 계셨다. 컨디션이 도저히 일어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셨다.

나중에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엄마는 그날 아빠와 함께 떠나고 싶었다고 한다.

아빠와 함께 가는 것이 엄마의 오랜 소원이었고, 간절하게 올린 기도의 힘일까, 그날 엄마는 아빠와 함께 갈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히지만, 우리는 엄마의 그 간절한 기도를 알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들었다 한들 누가 동참할 수 있었겠는가.

자식들의 밤샘 보살핌에 다음날 엄마는 기운을 차리고 일어나셨다.


손님이 모두 돌아가고 우리는 젊은 아빠 사진을 중심으로 벽에 기대어 앉았다. 아빠의 젊은 적 사진을 보며 인물이 좋다는 말을 시작으로 오빠들은 동생들이 알지 못하는 아빠의 모습과 추억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우리는 아빠의 젊은 날들을 머릿속으로 그리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띄었다.




나는 아빠의 사진이 젊은 모습이라 다행이라 생각했다.

내가 최근까지 봐왔던 뼈만 앙상하게 남아 작아진 아빠의 모습이 아니어서,

볼이 헬쓱한 아픈 모습이 아니어서,

어깨가 축 쳐진 힘없는 모습이 아니어서,

흰머리가 힐끗한 나이든 모습이 아니어서,

흐릿한 기억속의 어딘가의 모습이긴 하지만 낯선 모습이어서,

모든 것을 시작할 수 있는 패기있는 모습이어서,

단정하게 넘긴 머리카락과 꽉 다문 입이 세상을 향해 크게 한발을 내딛는 용기있는 모습이어서,

그래서 나는 아픔 대신 안도했다.

그래서 나는 웃음 속에 슬픔을 감출 수 있었다.


그 갇혔던 슬픔이 밖으로 나오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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