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알다시피 최근 필사를 하기 시작했어. 역시나 지독한 악필이더라. 어떤 때는 내가 썼는데도 못 알아보겠는 거야. 그래서 나는 왜 이렇게 글씨를 못 쓸까 곰곰이 생각해 봤거든. 금방 알겠더라고. 눈은 이미 다음 문장으로 넘어갔는데 손은 그 속도를 못 쫓으니까, 자꾸만 마음이 급해져서 글씨가 뭉개졌던 거야. 그게 싫어서 손가락에 힘을 주어 눌러쓰면 어린애가 쓴 것처럼 투박해지더라고. 동그라미가 너무 크거나 작고. 자음의 크기가 모음에 비례하지 않거나, 음절의 위치가 잘 맞지 않아서 삐뚤빼뚤했지. 그런 습관이 굳어져서 내 필체가 되어버린 것 같아. 조급해서 무너지고, 잘못 써서 지우고 마는. 그 글씨를 보면서 내가 살아온 방식을 생각해 보게 되더라.
나는 무슨 일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고 대뜸 출판업에 뛰어들었다가, 발만 적시고 마케팅 업계로 도망치듯이 흘러온 거야. 그 흐름에서 벗어나는 게 두려워서 자꾸만, 되는 대로 살아왔던 거지. 대체 뭐가 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면서, 남들 뒤만 저 멀리에서 좇았던 것 같아. 그러면서도 자꾸 나만 뒤처지는 것 같아서, 조바심과 불안증에 시달려서 살고 있더라고. 제대로 나아가지도, 그렇다고 이 순간을 즐기지도 못하고. 삐뚤빼뚤. 그냥 사는 게, 이대로 어떻게든 살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 어떨 때는 괜찮다가 어떨 때는 침울해지곤 해.
나도 많이 두렵거든. 이 회사에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이직한다고 해서 지금보다 나은 곳으로 갈 수 있을까.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전전하다가 결국 별볼 일 없는 사람이 되지는 않을까. 점점 나이가 들면서 시한폭탄을 안고 사는 것만 같은 기분에 휩싸여. 우리 어릴 때 가족오락관이나 해피투게더에서 폭탄 돌리기 게임 참 많이 했잖아. 폭탄이 터지기 전에 끝말잇기를 하거나 질문에 대한 답을 해야 하는 게임. 나는 그 게임에 자의 없이 참가한 게스트 같아. 시한폭탄이 이제 막 30초를 넘겨서, 언제 터질지 몰라 조마조마하는 게스트.
그래서 요즘에는 뭐라도, 정말 뭐라도 쓰려고 해. 뭐라도 하지 않으면 내 안의 무언가가 손쓸 새도 없이 펑하고 터져버릴 것 같았거든. 최근에 소설을 다시 쓰기도 하고, 에세이를 끄적이기도 하고, 필사를 하기도 하고. 그게 다 그런 이유였어. 그런데 당연히도 여태까지 안 쓰던 사람이 갑자기 쓴다고 글이 확 늘지는 않더라. 여전히 몇 자 못 쓰고 워드프로그램을 닫아버리거나, 어색한 문장들만 이리저리 꿰매서 늘어놓곤 해. 또, 그게 내 최선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근데 쓰다 보니까, 다른 건 몰라도 필체는 교정이 되더라. 힘을 좀 뺐더니 좀 더 자연스럽고 세련된 글씨가 나오기도 하더라고. 그 반대로 너무 힘을 빼고 쓰다가 글씨가 뭉개지면, 자음과 모음을 확실하게 끊어서 쓰기도 하고. 동그라미가 너무 제각각일 때는, 다른 건 다 제쳐두고 정말 동그란 'ㅇ'을 그리려고 해. 그러다 보니까 조금씩 달라지더라고. 한 글자, 한 글자. 이제는 내 인생의 모든 획을 써가는 매 순간을, 헛되이 보내고 싶지 않더라.
하지만 우리는 이제 잘 알잖아. 충분히 나이가 들었고. 이 감정도 언젠가는 희석되고 말 거라는 걸. 힘을 빼고 산다고 해서 더 괜찮은 사람이 되는 게 아니고, 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기에는 너무 어렵다는 걸 이제는 아프게 받아들였잖아. 그래서 솔직히 잘 모르겠어. 나 어떻게 살아야 할까. 나도 답을 찾아갈 수 있을까. 그래서 이 글을 좀 더 써보려 해. 이 편지를 읽는 네가, 내 필체를 잘 알아볼 수 있도록.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적어보고 싶어. 답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쓰면서도 여전히 헤매겠지만. 내가 어디로 가고 싶은지 조금은 알게 되지 않을까. 그러니 마지막 편지를 보내는 그때까지, 받는 이인 네가 잘 간직해 줬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