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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아로 May 16. 2024

어른이 될 줄 몰랐어.

너무 우울했고, 죽으려고 시도했고, 죽어지지 않아서 다시 우울했던 어린 나를 떠올린다.


피터팬처럼 영영 어린아이로 기억되고 싶었던 거 같기도 하고. 당장 죽으면 나를 괴롭게 만들던 사람들에게 죄책감을 심어줄 수 있을 거 같기도 했다. 무엇보다 태어나기를 내가 선택할 수 없었다는 게 싫었다. 난 왜 살아있지. 태어난 이유가 뭐지? 왜 고통받으면서 까지 삶을 유지해야 하는 거지?


죽는 날은 내가 선택할래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도 태어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사실 이유가 있을 리가 있나? 엄마도 낳았더니 내가 나왔던 것일 텐데. 쓸데없는 고민하기를 멈추고 버릇처럼 인터넷에서 출처모를 우울증 자가진단표를 검색했다. (자가진단 할 거면 많이 우울하다는 말이니 나처럼 회피하지 말고 얼른 정신과를 가길 바란다.) 역시나 한결같이 높은 점수. 예상했던 결과에 울지도 웃지도 못했다. 내가 우울증이라는 것을 정신과에서 이미 진작 진단받았음에도 속상하고, 눈을 뜨고 있자면 좋지 않은 생각만 들어서 회피성으로 죽은 듯이 잠만 자는 삶. 끝나버린다고 해서 뭐 그렇게 큰일이 날까?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끼며 그렇게 3년을 살았다.


당연히 죽을 줄 알았던 시간들을 지나 스무 살이 된 1월 1일. 새해 아침이랍시고 활짝 열어둔 창문에 찬 바람이 너무 들어왔다. 잠결에도 서늘함을 느꼈던 탓인지, 이불을 있는 힘껏 둘둘 말고 누워있던 내가 생각난다. 몽롱한 상태로 누워있던 내게 문득 밀려온 두려움도.


“나 지금 스무 살인가? 이제 어른인 건가?”


핸드폰으로 날짜를 확인하니 진짜 1월 1일이다. 나는 밤중에 드린 송구영신예배가 꿈인 줄 알았지. 꿈이길 바란 건가? 비현실감 때문에 그렇게 생각했나? 이제 우리도 성인이니 술집에 가자며 잔뜩 신이 난 친구들의 연락을 무시한 채 핸드폰을 내려두고 눈을 감았다.


‘내가 어른이 되기 전에 죽지 않았다니.
이제 어떡하지 ‘


시설 선생님들은 어른이 되면 내 행동엔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입이 닳도록 말하곤 하셨는데, 난 뭐 책임질 게 없었다. 뭘 할 생각도 계획도 없었다.

친구들의 3년은 대학교라는 목표를 보고 달리는 마라톤이었을 테다. 새롭게 펼쳐질 세상을 상상하며 열심히 뛴 누군가와 달리, 나는 마라톤은 시작도 못했다. 출발선에 서기도 힘들었다. 물먹은 솜처럼 축 늘어져있기에도 벅찼다. 스무 살이 되면 이거 해야지 저거 해야지 생각하는 것도 사치라고 생각했었는데, 안 죽었네. 낭패였다. 아주아주 큰.


고민 끝에 이럴 거면 차라리 술이라도 마시자 싶어 핸드폰을 다시 들었다. 감사하게도 친구 부모님께서 마음껏 놀라고 집을 하루 비워주셔서, 삼삼오오 모여 곱창과 소주를 시켜 먹었다. 오랜만에 즐거웠다. 어른이 된다는 게, 마음대로 취한다는 게 이런 거구나.


내 상황을 잊을 수 있다는 게 좋았다. 누가 가르쳐준 적도 없는데 힘드니까 자꾸 술을 찾아댔다. 술 많이 먹는 건 아빠를 닮는 건가? 역시 피는 못 속이는구먼. 시답잖은 생각을 했다.

2일, 3일 새해의 시간은 흘러가는데, 난 매일 저녁이 되면 하릴없이 술집으로 달려갔다. 우울을 잊고 멍한 정신으로 농담 따먹기. 푸하하 웃으며 친구들과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집을 오래 비웠다. 보육원 선생님들이 아이들도 있으니 술냄새 풍기면서 들어오지 말라고 해서, 술을 안 먹는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없었기에 맘대로 외박했다.


‘나 이제 성인인데 좀 놀지 뭐.’


얼떨결에 어른이 된 어린 나는, 당황스러웠다. 핑계를 댄 것도 같다. 계획이 없었더라도 더 많은 것을 도전해 보며 새롭게 보낼 수 있었던 스무 살 초반을 술로 흥청망청 보내버렸다. 이미 지나간 시간들이니 성격상 크게 후회하진 않지만, 그래도 사람인지라 조금은 아쉬운 마음이 들긴 한다. 방황할 시간에, 걱정할 시간에 진작 계획을 세우고 도전했다면 더 나은 시간을 보냈을 텐데.


물론 억울하지만 나 행동의 결과를 알고 있었다고 해도 별 도전 없이 깊은 우울감에 빠져 있었을 거 같다. 이렇게 오랜 시간 우울증은 나와 같이 있었고, 많은 결정을 미루게 했다. 내 스스로 조금 더 괜찮게 지낼 기회를 빼앗아가기도 했다.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은 인정하겠지만, 이게 잘 지내고 싶은 의지와 상관있지 않다. 그냥 모든 게 힘들다.) 나중에는 괘씸하게도 하기 싫은 일이 생겼을 때, 우울함이 하나의 핑계가 되더라. 나는 우울하니까 할 수 없다는 헛소리. 글을 적으면서도 괘씸하다.




우울증을 앓으며 일어난 일들을 조금씩 적어내고자 다짐한 뒤에, 글이 나아갈 방향을 정하기 위해 내가 무엇을 위해 쓰는지를 우선 확실히 했다. 나는 쓰는 과정을 통해 내가 치유되길 바란다. 그리고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비슷한 상황 속에 있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길 원한다. 


한참 우울할 때 죽는 법을 검색하다가 우연히 우울증을 겪는 사람들의 글을 접하고, 쭉 구독하고 읽으며 동질감을 느꼈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받은 위로가 여태 생생하다. 그 결과로 이렇게 죽지 않고 뭐라도 하고 있으니까.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어준다면 참 기쁠 것이다.


나의 엉성한 글이, 서툴지만 잘 살아가려 발버둥 친 흔적들이 누군가에게 닿아 ‘그래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되어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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