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진아로 Jun 06. 2024

감당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

9살, 조금 일찍 철이 들었다.

어렸던 내가 겪어내야 했던 일들은 지금 돌이켜보면 너무나도 무겁고 곤란한 일들 투성이었다. 아빠의 폭행을 피해 도망 다녔고, 엄마가 우리 자매를 두고 떠나버렸다. 갈 곳 잃은 폭력은 엄마를 닮았다는 이유로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 되었다. 친한 친구들과 강제로 이별하게 되었고, 새로운 환경에서 적응하면서 동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내 가족은 동생 하나뿐이라 생각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웃을 상황이 몇이나 될까? 난 항상 무표정으로 지냈다. 웃음이 나올 리가 만무한데도 어른들은 늘 내게 우중충하고 숫기가 없다며 앞에서 대놓고 내 욕을 하곤 했다. 싹싹한 동생과 비교당해도 그저 내 문제라고 느꼈다. 나는 밝게 자라야 한다는 나만의 규칙이 생겼고, 최대한 마음을 숨기고 힘든 일들을 견뎌냈다. 동생은 나처럼 빠르게 상황에 수긍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어린 동생이 늘 마음에 쓰였다. 나 혼자 힘들어서 다 견뎌낼 수 있는 일이라면 동생에게까지 굳이 짐을 지우고 싶지 않았다. 

다짐을 아무리 해도 이상하게 내게는 계속 안 좋은 일들이 몰려왔고 나를 무너지게 했다. 동갑내기가 없는 학교에서 은근히 따돌림을 당했고, 엄마에게 통화가 걸려올 때면 아빠가 시키는 대로 욕을 했어야 했다. 그 쯤부터 내 인생에 대해 자주 돌이켜본 거 같다. 내가 열심히 하고 잘 보이려고 노력해도 나를 미워할 사람은 분명히 존재한다는 걸 깨달았다. 아마 내 가치관과 고집들이 이 시기부터 형성되었다고 생각한다. 이걸 뭐 감사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아무도 나를 이해할 수 없다고 느끼게 되면서 자꾸 혼자 짐을 짊어졌다. 누가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보아도 무조건 괜찮다고, 별일 없다고 자동응답기처럼 이야기 했다. 풀어놓을 곳이 없으니 짐은 빠르게 불어났고, 견디다 못한 나는 짐들에 깔려 마음에 병이 생겼다. 화가 날 때마다 감당할 수 없는 분노에 물건을 집어던지는 날이 점점 늘어났다. 


뭐 결국엔 아빠와 같은 행동을 한다는 걸 깨닫게 되어, 스스로에 대한 역겨움에 더 이상 화를 잘 내지 않게 되었지만. 보고 자란 게 그것뿐이니 당연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대신 화내는 법을 잃어버려 우울증이 심해지긴 했지만  내 행동이 옳지 못하다는 걸 빨리 깨달았음에 감사함을 느낀다.




성인이 되고 교회에서 아이들을 만나는데, 정말 작고 소중한 존재들이라 느낀다. 나는 왜 저렇게 작고 어린 나이에 받아야 할 사랑을 받지 못한 건지, 왜 내가 겪은 고통들은 짐이 되어 여태 나를 따라다니는지 가끔 억울하기도 했지만, 나처럼 자라지 않길 바라기에 더 아이들을 사랑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까르르 웃어 보이는 아이들을 보고 있자면 어린 내가 치유받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아이들이 쪼로로 달려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줄 때면 너무 큰 행복함을 느낀다. 내가 이 아이들에게 믿을만한 사람이 되는구나 따스함을 느꼈다. 어린 날의 내게도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었다면 내가 조금은 덜 우울했을까? 그런 생각이 들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운 것들을 짊어지던 어린 날의 내게 보내는 포옹이라 생각하며 눈앞의 아이를 꽉 안아주곤 했다. 


많은 것을 짊어진 어린 날의 내게, 그리고 그 시간을 함께 견뎌준 동생에게 이 글을 전한다.


이전 03화 번데기는 당연히 나비가 될 줄 알았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