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City Life : 男2 女2 시트콤
사소한 킬러 25화
그런 거 있잖아요. 싸우다 불리하면 ‘너 몇 살이냐?’고 따지는 거.
딱 그 꼴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학교 선생님들은 ‘댁의 아들이 동성애 기질이 있으니 알아서 학교를 나가라’고 불렀는데 이자영이 만만치 않게 나오니 재수 없고 짜증 터지는 상황이 된 거였습니다.
알아서 기어야 하는데 말이죠.
'뭐 하는 인간이냐?' '무례하다'라고 따지면서요. 씁.
참! 이자영이 외롭게 선생님 2명을 상대로 분투하는 동안 남편대행 캘러한은 뭐 하고 있었냐고요?
그냥 있었습니다.
완전히 가만히 있지는 않았고요, 콧구멍을 후비거나 먼 데를 쳐다보는 방식으로 현실을 회피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자영이 선생님들과 싸우는 동안 계속 신호했죠.
그녀가 머리를 한 손으로 쓸어 넘기는 신호를 보내면 캘러한이 못 참겠다는 듯이 벌떡 일어나서 ‘깽판'을 치기로 약속했거든요.
그런데 캘러한이 멀뚱멀뚱 가만히 있었습니다.
‘오른손이 아니었나?’
왼손으로 다시 머리를 쓸어 넘겼습니다. 이번에도 멀뚱멀뚱, 분명히 봤는데도 말이죠.
그래서 한번 더.. 또 한 번 더..
스트레스로 머리가 터질 것 같은 이자영의 손에 머리칼이 한 움큼이나 빠질 때까지 캘러한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학교 면담 후
“도대체 뭐야? 내 신호 못 봤어?”
“봤는데.”
“내가 머리칼을 이렇게 쓸어 넘기면 어떻게 하라고 했지?”
“깽판 치라고.”
“그런데 왜 안 했어?”
“내가 왜 깽판을 쳐야 하는데?”
“그렇게 약속했으니까.”
“난 안 했어. 혼자 한 거지.”
“그랬나?”
“응.”
캘러한은 좀체 거짓말하지 않죠. 그 사실을 이자영도 알고 있었습니다.
아쉬운 부분입니다. 약속했다고 우겨볼 여지조차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랬구나.”
이자영은 쿨했습니다.
어쩌면 집중력이 좋아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머리에 담을 수 없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용량 부족으로 뒤끝이 없는 거죠.
또는 당장은 캘러한을 이용해야 하는데 지나간 일을 두고 따져봐야 이득이 없다고 판단한 것일 수도 있어요.
“그래도 그렇게 가만히 있는 건 상도의가 아니지. 프로 캘러한은 어디 갔나? 돈을 받았으면 돈값을 해야지!”
“애초에 그런 일로 날 부른 건 아닐 텐데. 고작 학교에서 깽판이나 치라고 말이야.”
“그건 맞아. 하지만 당신도 분위기는 알아야 할 거 아니야. 아무리 나라도 아이 학교까지 혼자 와서 외롭게 싸우고 싶지는 않다고.”
“그냥 전직 검사 출신 변호사라고 하지 그랬어? 저런 인간들에게는 잘 통할 텐데.”
“큰일 날 소리를. 요즘 그랬다가는 더 난리 나. 변호사도 짤린다고.”
“그런가? 그럼 돈 주든가.”
“저런 인간들에게 돈을? 그럴 바에는 차라리.”
“차라리 뭐?”
이자영이 얼굴을 찡그리고 입을 꼭 다물었습니다. 속에서 천불이 납니다.
성질 같아서는 선생들을 때려 패고, 깜빵에 처넣고, 학교에다 확 불을 싸지르고 싶습니다.
‘선생이란 것들이 저러니까, 학교라는 것이 저따위이니.’
“차라리 죽일까?”
속에서만 했던 생각이 입 밖으로 조금 흘러나왔습니다.
“그러든지.”
캘러한이 무덤덤하게 받았습니다. 어차피 그는 킬러니까요.
그러자 이자영이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아니다. 말자.”
“왜?”
“당신, 실력은 확실해도 너무 비싸잖아. 싸게 해 주면 몰라도. 큭.”
“변호사면 돈 많이 버는 거 아니야?”
“어이, 아무리 너라도 이 나라에서 산 게 몇 년인데 아직도 세상 물정을 그리 몰라? 내가 검사하면서 빚진 게 얼마인데. 집도 차도 전부 은행 거야. 말하고 보니 서럽다. 명색이 대한민국 검사로 산 게 몇 년인데.. 아직도 내 소유가 하나 없어! 부처님, 제가 무소유를 이렇게 실천하고 있습니다.”
“싸게 해 주지. 나도 빚진 게 있으니.”
캘러한이 좀체 하지 않는 말을 했습니다. 의뢰비를 깎아준다는..
둘 사이에 분명 뭔가 더 있는 거죠.
이자영이 조금 생각했습니다.
“고맙긴 한데, 그래도 대한민국 검사가 살인청부를 할 수는 없지.”
“이제 검사 아니잖아.”
“맞아. 그랬지? 내가 자꾸 까먹는다.”
이번에는 이자영이 깊은 고민에 들어갔습니다. 이게 고민할 문제인지는 전혀 모르겠지만요. 학교 선생님이 재수 없게 군다고 살인청부를 한다? 폭력 선진국에서도 그러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죽이고 싶은 인간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니 캘러한은 참을성 있게 이자영의 결정을 기다렸어요.
“그럼 부탁해 볼까?”
뭐죠? 설마 이자영 변호사가 살인청부를 의뢰한 거예요?
“그렇게 쉽게 마음이 바뀌었나?”
캘러한도 의외다 싶었는지 한번 더 확인했습니다.
“생각해 보니 나도 정의를 실천해야 할 공공의 의무에서 벗어났으니 내 맘대로 살아보려고. 전부 지들 맘대로 사는데 왜 나만. 따지고 보면 그 선생들이 계속 잘 살아 있다고 이 세상을 더 낫게 만들거나 애들 교육에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고. 또 내 손에 피 묻히는 것도 아니니까.”
“당신 손에 피 안 묻히면 살인이 아니다? 그런 논리인가?”
“당연하지. 이 나라에 간접적으로 살인하지 않는 인간이 몇 이나 될 거 같아? 조금이라도 힘 있는 놈들이 저 하고 싶은 대로 하다 보면 가장 약자가 이리저리 치이다가 궁지에 몰리면 죽는 세상이야. 그리 따지면 먹이사슬 상위에 있는 것들은 모두 살인자지.”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어디까지가 변명일까요? 저는 모르겠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캘러한은 그녀의 진심에 관심 없습니다. 간접 살인 논리도 모르겠습니다. 의뢰와 돈에만 관심 있습니다.
캘러한은 이자영을 조금 응시하더니 물었습니다.
“확실히 결정한 거지?”
“그래.”
“그럼 오른쪽, 왼쪽?”
“응? 뭐가?”
“내 기준으로 오른쪽에 있던 선생을 죽여? 왼쪽을 죽여?”
“아, 그 말이었구나. 좀 쉽게 말하자. 둘 다는 안 되겠지?”
“안 될 거 있나?”
“싸게 해 줘도 그 정도 돈은 없어. 그리고 둘 다는 너무 심하니까.”
“둘은 심하고 하나는 안 심하다. 이상한 논리이군. 그러면 어떡해?”
“둘 중 아무나. 누가 죽을지 난 선택하고 싶지 않아. 내가 신도 아니고.”
“나는 괜찮고?”
“당신은 킬러잖아! 아니야?”
“그것도 그렇군. 오케이. 일 끝나면 연락할게.”
“안 해도 돼. 일처리 확실한 거 알고 있으니까. 난 오늘로 우리 애 학교 일은 잊을래. 다른 것만도 머리 터질 것 같아. 전학 갈 데도 알아봐야 하고.”
“자기 합리화가 늘었어.”
“자기 방어라고 해줄래?”
“오케이. 간다.”
“잠깐.”
“또 뭐?”
“마담이 찾아왔어.”
캘러한의 표정이 굳었습니다.
사실상 우리 이야기에서 캘러한의 얼굴이 굳은 건 처음입니다. 그럴 만한 건덕지가 없었던 거죠.
도대체 마담이 누구기에... 캘러한이 술값 떼먹고 도망간 술집 마담이 아닌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래서, 말했어?”
“이미 알고 있던데. 당신 찾더라.”
캘러한은 이자영 변호사를 무섭게 쏘아봤습니다. 살기만으로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무섭게 보지 마. 난 아무 말 안 했어. 하지만 곧 당신을 찾아갈 거야. 알잖아. 그 여자가 찾기로 들면 못 찾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 그동안 숨은 것만도 다행이지.”
잠시 이자영을 노려보던 캘러한은 기세를 누그렸습니다. 그리고 뒤돌아 이자영의 사무실을 나갑니다.
그의 등에 대고 이자영이 말했습니다.
“조심해!”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그야 잘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