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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란 Nov 07. 2019

너무나 <그랬기> 때문에

출근길 신호대기하는 시간, 그녀는(4)

열 두 번 째 신호등 앞이다. 


이 신호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시어머니가 크게 교통사고를 당했다. 무단횡단을 하던 시어머니가 1톤 트럭에 부딪혀 몸뚱아리가 신발짝처럼 가볍게 휘익 하고 날아갔다고 했다. 어머니는 설을 코앞에 두고 우리에게 나눠줄 익모초 엑기스를 찾아오는 길이었다. 나는 평소에도 물을 거의 마시지 않았는데 어머니는 때마다 손수 기른 무슨 약초들을 잡탕으로 끓여서 나를 먹이려고 하셨다. 그리고 다 먹었는지를 늘 확인하셨다. 나는 다 먹지 못하고 그걸 개수대에 버리면서 어머니를 원망하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내가 얼마나 철이 없었는가 싶다. 하지만, 그런 게 부모님 사랑이지 따위의 넋두리는 지금  내게 중요하지도 않고 관심도 없다. 나는 내 소설만을 생각한다. 그리고 아주 아주 가끔 이런 나는 얼마나 윤리적인가도.


어제는 하루 종일 14번째 소설을 생각했다. 써놓고 나니 홍상수 영화 같았다. 지질한 일상을 지질하면서도 지질하지만은 않게 홍상수는 잘도 만들더라만 내 소설은 끝없이 지질하기만 했다. 그와의 여행에 관한 소설이다.    




열네번째 소설/태풍


가고 싶지도, 가기 싫지도 않은 여행을 그와 함께 갔다. 동해로 갈까요 남해로 갈까요 하는 그에게 남해, 라고 말해버렸다. 두 곳 다 가고 싶지도, 가기 싫지도 않았는데 그냥 말이 그렇게 나와 버렸다.


“2박3일 괜찮아요?” 


하길래 괜찮지 않다고 말했다가 괜찮다고 다시 고쳐 말했다. 2박3일 동안이나 뭘 하지가 걱정되어서 괜찮지 않다고 말했는데 혹시 그는 나와 다르게 뭔가 할 게 많은가 싶어서 그리 말했다. 두 사람 중 하나만 제대로 일을 꾸미면 지루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는 떠나기 며칠 전 나에게 준비물 목록을 휴대폰 문자로 보냈다.

  

달걀(중) 10개, 중간크기 감자 6개, 완숙토마토(대) 6개, 양파(중) 2개, 피망색깔별로 1개씩, 비트 1개, 버섯 한모타리, 샐러리(30센치) 3줄기, 마늘 20알, 그리고 과일 조금 준비해 주세요. ^^


나는 걱정되었다. 첫 번째는 김치, 참치, 쌀 이런 것들이 없어서였고 두 번째는 가져오라는 야채를 세는 단위나 크기나 너무나, 그러니까 너무나 '그랬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너무나 계량적이고 치밀했다. 세 번째는 난 평소에 달걀을 한 달에 2개도 안 먹고, 샐러리는 최근 10년 동안 먹어본 기억이 없으며, 완숙토마토도 1년 동안 반쪽정도 먹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나는 비트가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몰랐다. 나는 “비트”라는 싸구려 가루비누 이름 정도를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문자를 받고나서도 나는 전혀 신나거나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흔쾌한 듯이 답 했다. 준비할게요. ^ ^  라고. 


그는 저녁에는 봉골레 스파케티를 할 것이고 다음날 아침에는 토마토스프를 곁들인 간단한 프랑스 요리를 할 거라 했다. 점심과 저녁을 밖에서 해결하고, 그 다음 날 아침은  달걀로 부드러운 뭔가를 할 거라고도 했다.



나는, 아침은 언제나 굶고 점심은 직원들과 사먹으며, 저녁은 김밥이나 컵라면을 먹곤 했다. 떠나기 싫어졌다. 평소 나는 내 배 불리고자 음식을 하느니 자는 걸 더 좋아했기 때문이다. 언제나 쉬고 싶었다. 심지어 지금 막 쉬고 난 뒤에도.


우리는 태풍이 한반도에 상륙한다던 날 떠났다. 태풍이 오기로 한 날 떠나기로 한 것은 아니었고 우리가 떠나기로 한 날 태풍이 올 거라 했다. 각종 매스컴 기자들은 장담했다. 하지만 그날 아침 날씨는 말짱했다. 나는 전날, 태풍 오는 날씨에 어울리는 옷들을 챙겨 넣었는데 아침 날씨가 말갛자 쨍한 날씨에 어울리는 옷들로 바꾸어 가방에 넣었다. 그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잘 보이지 않을 이유도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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