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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찌 Sep 19. 2020

배추의 꿈

엄마의 사랑


어느 한 배추밭에 유독 눈에 띄는 배추가 있었다.

잎은 푸르다 못해 쨍하며 새하얗고 탱탱한 줄기는 다른 어느 것들과 비교되었다.

여느 배추들과 마찬가지로 수확될 날만 기다리며 바람이 불고 비가 와도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몇 달째 늘 같은 곳을 바라보던 중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거지? 이렇게 살다 가공되고 사람들 입 안으로 들어가는 게 내 삶인가?'


지평선 너머 배추는 바라봤다.


'저 너머는 무엇이 있을까?'


그 날 이후 배추는 지평선 너머를 동경하기 시작했다.


어느 비가 오는 밤.

멀리서 나비가 비를 피할 곳을 찾으며 헤매고 있었다.


"애들아 길을 잃어버려 여기까지 왔어. 잠시만 비 좀 피할 테니 앉게 해 줄래?"


하지만 다른 배추들은 해가 될까 기겁하며 한사코 거부했다.


"나비야 여기 와서 앉으렴"


배추는 이리저리 홀딱 젖은 채 방황하는 나비가 안쓰러웠다.


"너 미쳤어? 갉아먹거나 알이라도 까면 어쩌려고 그래?"

"괜찮아 별 일 없을 거야."

"너 그러다 무덤 간다."


무덤.

그곳은 썩거나 시들해져서 상품성 없어진 배추들이 가는 곳이다.

나비는 비에 젖어 덜덜 떨고 있었다.

배추는 갈등했지만 불쌍한 나비를 외면할 수 없었다.


"여기 앉아."

"고... 고마워."

"넌 어디서 왔니?"

"난 꽃밭에서 왔어. 여기 너머 있는 곳이야."

"진짜?! 꽃밭? 거긴 어떤 곳이야?"

"빨갛고 노란 꽃들과 나비와 벌들이 사는 곳이야."


다른 곳에 가본 적 없는 배추는 언뜻 상상이 가지 않았다.

아리송한 표정의 배추를 본 나비는 갑자기 생각난 듯.


"아 맞다. 그럼 향을 맡아볼래?"


나비는 자신의 다리를 배추에게 문질렀다.

그 순간 처음 느껴보는 달콤하고 상큼한 향이 배추를 감쌌다.


"와! 뭐야? 처음 맡아보는 향이야."


설레면서도 따뜻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배추는 나비에게 언덕 너머에 대해 많은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윽고 비가 그치고 나비는 떠날 채비를 했다.


"나비야 여기 자주 놀러 와!"

"그래 약속할게"


그러곤 이내 나비는 훨훨 날아가버렸다.


"넌 실수한 거야"


그 모습을 본 주변 배추들이 모두 비난했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처음으로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었으니 그걸로 좋았다.


하루 이틀.

배추는 나비를 기다렸지만 나비는 나타나지 않았다.

언덕 너머 바라보고 기다리는 게 일상이 되었다.

오늘도 변함없이 바라보는 그때.

밑에서 뭔가 꼬물거리는 느낌이 났다.


'응?!'


애벌레였다.

지난 비가 오는 밤 나비가 알을 낳고 갔다는 걸 알았다.


'분명 키우게 되면 가치가 낮아져 버림받고 무덤으로 가겠지?'


배추는 갈등하고 고민했다.

.

.

.

애벌레는 배추의 품이 좋았다.

더울 땐 그늘이 되고 추울 땐 감싸주며 배고플 땐 잎을 제공해주었다.

애벌레는 무럭무럭 자랐다.


"엄마! 저 너머에는 뭐가 있어?"

"응~ 저 너머엔 꽃밭이 있어."

"꽃 밭? 거긴 어떤 곳이야?"

"응 빨갛고 노란 꽃들로 가득 차 있지."

"와 신기하다. 푸른색 말고 다른 색이라니!"

"달콤하고 상큼한 향이 넘쳐나는 곳이야."

"엄마 나 꼭 가보고 싶어! 엄마도 같이 갈 거지?"


배추는 머뭇거렸지만 이내 웃으며 답했다.


"그럼 물론이지."


날이 갈수록 애벌레는 쑥쑥 자랐지만 비례해 배추는 점점 야위어져 갔다.

잎은 갉아먹은 많은 자국과 함께 누렇게 시들어져 가고, 새하얗던 줄기는 윤기를 잃고 푸석하게 변해갔다.


"엄마 괜찮아? 나 때문에 힘든 거 아냐?"

"엄마 걱정하지 말고 많이 먹어."


배추는 건강하게 자라는 애벌레가 대견스럽고 든든했다.


"엄마 나 졸려."

"그래 눈 좀 붙이렴."

"자장자장 우리 아가..."


애벌레는 몸이 굳기 시작했고 이윽고 번데기가 되었다.


"그렇게 이쁘고 생생한 네가 어쩌다 이렇게 됐니."

"지금이라도 버려."

"넌 이제 버림받아 무덤으로 갈 거야!"


옆에서 보던 이들은 혀를 차며 비난했다.

하지만 배추는 몇 날 며칠을 조용히 그리고 묵묵히 버티고 견뎠다.


"엄마! 엄마!"


이른 아침부터 시끄러운 소리에 배추는 눈을 떴다.


"웬 호들갑이니? 어머!"


배추는 애벌레의 모습에 눈이 동그래졌다.

새하얗고 큰 날개와 잘빠진 몸매의 나비가 보였다.


"엄마! 나 날 수도 있어!"


나비 아니 아이는 펄럭이며 신이 나 배추 주위를 맴돌았다.


"엄마 내가 먼저 꽃밭 어딨는지 확인하고 올게."

" 그래."


아이는 신나서 훨훨 날아갔다.

그런 아이가 자랑스럽고 대견한 엄마.


* * *

배추는 결국 쭈글쭈글 생기 없는 줄기와 푸석하고 시들어버린 잎만이 남았다.

다른 싱싱한 배추들이 대접을 받으며 트럭에 실릴 때 상품성을 잃은 배추는 쓰레기장으로 향했다.

나비는 몇 시간이 지난 후 다시 돌아왔지만 배추가 있을 곳엔 뽑힌 흔적만 있었다.


"엄마! 엄마! 어딨어?"


아이는 한참을 날아다니며 엄마를 찾았다.

저 멀리 썩은 배추들 사이에서 엄마를 발견했다.


"엄마 왜 이런 곳에 있어? 내가 꽃밭을 찾았어! 빨간 꽃 노란 꽃 말고 엄청나게 이쁜 꽃도 있고..."


아이는 엄마 앞에 그동안 보고 겪은 것을 신나게 떠든다.


"향도 여러 종류야. 내가 특별히 여러 개를 묻혀왔지."


아이는 이 향 저 향 엄마에게 내밀 어보지만 심한 악취에 묻힐 뿐이었다.


"향이 참 좋구나..."

"엄마 이런 더럽고 냄새나는 곳 말고 꽃밭으로 가자. 같이 가기로 했잖아."


아이는 코를 막고 얼굴을 찌푸린 채 주위를 둘러본다.


"응... 그래... 근데 엄마가 좀 피곤해서... 잠시 눈 좀 붙일게..."


엄마는 옅은 미소를 띠며 눈을 감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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