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8시에 눈을 떠 커피를 마시며 간단한 에세이 한 편을 쓴다. 신기하게도 매일 쓰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걸 보면 난 꽤 수다스러운 인간임에 틀림없다. 혹은 이전에 써놨던 걸 꼼꼼히 퇴고하는 과정을 거친다. 계속 뭔가를 쓰지만 스스로 마음에 드는 글은 손에 꼽히고, 대부분은 몇 개월 뒤 다시 읽으면 조악한 솜씨가 느껴진다. 어쩌면 끊임없이 흑역사를 생산하고 있는 것 같아 부끄럽지만 그래도 쓰는 즐거움이 더 크다.
10시가 되면 요가원에 간다. 회사 생활을 할 때 느꼈던 극심한 어깨 통증을 계기로 1년째 요가를 하고 있다. 하루의 큰 행복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정도로 요가에 대한 애정이 크지만 사실 내 몸은 무척 뻣뻣하다. 아직도 기초 동작인 다운독 자세를 할 때 다리가 다 펴지지 않는다. 상대적으로 잘하는 건 수영이지만 요가 수련을 할 때만 얻을 수 있는 기쁨이 있다. 글쓰기와 마찬가지로 실력이나 결과에 상관없이 그냥 매일 한다. 사심 없이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건 무척 소중한 일이 아닐까.
집에 와 간단히 밥을 먹고 씻고 나면 벌써 오후 1시다. 맡고 있는 외주 작업이나 계약직으로 일하는 회사의 일을 한다. 일주일에 두 번, 회의 때문에 출근하는 날을 제외하면 하루가 끝날 때까지 누군가와 대화할 일이 없다. 온통 내 세계에 골몰한 채 백지였던 바탕을 글자로 채우다 창 밖을 보면 어느새 어둑해져 있다. 쓰는 주제는 매번 다르다. 고교학점제, 아프간 사회 등 시의적인 소재를 가공하기도 하고, 초중량물 운송 기술처럼 생소한 내용을 학습해 영상 대본으로 만들기도 한다. 뭐든 쉽게 뚝딱 완성되는 건 없다. 가끔 과도한 정보와 마감에 대한 압박에 머리가 지끈거리지만 괜히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비위를 맞출 필요가 없어 좋다.
그렇다고 사람 스트레스가 전혀 없는 건 아니다. 한번은 한 대행사로부터 업무 제안을 받은 적이 있다. 가전제품과 관련된 텍스트 콘텐츠를 제작하는 일. 이미 하고 있는 일이 많았지만 대기업 앱에 들어갈 콘텐츠라 경력에 도움될까 싶어 샘플을 제출했다. 회신이 오지 않았다. 담당자분께 전화해 어떻게 된 건지 여쭤보니 연락을 한 줄 알았는데 발신이 가지 않았다며, 샘플이 좋으니 함께 일하자고 하셨다. 다음 달 중으로 시작할 예정이라고 하셔서 알겠다고 했으나 한 달이 지나도 연락이 없었다. 메일로 다시 구체적인 일정을 여쭸으나 이번에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이 회사와는 더 이상 엮이지 않는 게 낫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바쁜 탓에 신경 쓸 여력이 없어 금방 잊어버렸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고, 여유가 생기니 문득 다시 생각이 나 메일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부장님. 올해 4월 S사 프로젝트 건으로 부장님께 업무 제안받고 샘플을 보냈고, 당시 유선 상으로 함께 하기로 얘기 나눴습니다.
5월 중으로 시작한다고 말씀 주셨는데 그 뒤로 지금까지 연락을 통 받지 못했습니다. 중간에 한번 메일을 보내 문의했는데도 회신을 받지 못했네요. 바빠서 잊고 있다가 최근 생각나 불쾌한 마음에 메일 보냅니다. 샘플 콘텐츠를 제작하고 소통한 시간이 있어 보상받고 싶습니다. 답장 부탁드려요.
사소한 거지만 해결을 하고 넘어가고 싶었다. 아무리 구두 계약이라 할지라도 문자 한 통 없이 누락시킨 게 마음에 걸렸다. 이런 식으로 일처리를 하는 건 대충 무시해도 딱히 문제 삼은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샘플 콘텐츠 제작 비용은 사전에 협의된 건 아니나 요구하는 게 경우에 어긋난 것 같지 않아 한번 말을 꺼내봤다. 그런데 부장님께서 따로 연락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며 정중하게 사과하시고, 대표님을 통해서도 사과를 받았다. 바로 처리해 주시겠다고 하셔서 비용을 협의한 뒤 입금받았다.
내규에 따라 콘텐츠 한 건당 책정된 비용으로 드리려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금액이 마음에 들지 않으실까 걱정이네요. 다음에 작업할 일 있으면 저희가 또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기분 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워낙 예의 바르게 말씀해 주셔서 오히려 감사했다. 크지 않은 금액이었으나 마음속 찝찝함이 모두 사라졌다. 원래도 눈치를 잘 보지 못했지만, 프리랜서가 된 뒤로 이처럼 일하며 불편한 감정을 털어놓고 원하는 걸 요구하는 부담이 덜해졌다. 한 회사에만 귀속된 게 아니고, 설령 갈등으로 번져 업무적인 압박을 받더라도 언제든 다른 곳과 일할 준비가 되어 있어서다. 가면을 쓰는 게 서툰 내겐 큰 장점이었다.
물론 프리랜서로 사는 것의 단점도 많다. 자유가 늘어난 대신 책임도 늘어났고, 가끔 미래에 대한 불안이 몰려오기도 한다. 친구들이 회사 복지 같은 걸 자랑할 때면 할 말이 없어 묵묵히 커피잔만 쳐다볼 뿐이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일까. 안정적이고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성장하는 이들이 부러울 때가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걸 포함하더라도 일의 중심을 ‘회사’에서 ‘나’로 옮기기로 결심한 건, 하기 싫은 건 하지 않기로 한 건 잘한 선택 같았다.
쉬는 날 잠시 명동에 들렀다가 오랜만에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고 싶어 걷기로 했다. 지도를 보니 도보로 한 30분 정도만 걸으면 되는 거리였다. 예전에 자주 오곤 했던 종로 일대를 다시 걸으니 반가웠다. 가는 길에 발견한 영풍문고를 둘러보다 사고 싶은 책을 메모하고, 나와서 잠시 청계천을 걸었다. 바람이 피부에 닿는 촉감이 기분 좋은 날씨였다.
막상 교보문고에 도착해 한 바퀴 둘러보고 나니 사고 싶은 게 없었다. 사회적 거리 두기로 앉아서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은 모두 없어진 상태였다. 서점 앞 벤치에 앉아 전자책이라도 읽을까 했지만 오래 앉아있기엔 더운 날씨라 집에 가기로 했다. 갑자기 딱히 교보문고까지 올 필요는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날씨가 좋고 집에 들어가긴 아쉬워 좀 걷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지만 워낙 길치라 서울은 자주 와도 잘 모르니 목적지 같은 게 필요했던 거다.
종종 그랬다. 끝까지 완주한 기억은 드물지만 난 목표를 세우는 걸 좋아했다. 한때는 승무원이 되고 싶다는 꿈을 품었고, 중국과 한국을 오가는 크루즈 승무원 자리 인터뷰가 잡히기도 했지만 고민 끝에 가지 않았다. 막상 기회가 오니 이건 내가 가고 싶은 길이 아니란 걸 깨달았으니까. 매번 단순한 업무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고, 공들여 화장을 한 채로 긴장되는 옷을 입고 불편한 신발을 신는 것도 싫었다. 처음엔 그런 화려한 이미지 때문에 이끌렸으나 그건 그냥 막연한 동경이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 직업에서 감당해야 할 것들을 제대로 헤아리지도 않은 채 왜 목표로 삼았을까? 목표가 있는 건 여정을 불안하지 않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정해진 궤도를 따라가고 있다는 기분이 들게 하고, 좀 더 의미 있는 현재로 꾸며준다. 자주 오는 서울을 헤매는 것처럼 인생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를 때가 있다. 그럴 땐 목적지가 있다는 것만으로 조금 안심이 된다.
그동안 난 목표를 끝까지 끌고 가지 못했던 내가 끈기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었던 것 같다. 승무원이란 꿈을 가진 덕분에 영어 공부를 열심히 했고, 무턱대고 잡은 영어 인터뷰를 통과해 10개국에서 온 외국인 친구들과 스태프로 일하며 합숙한 적도 있다. 지금의 나였으면 절대 도전하지 않았을 일이다. 목표 덕분에 그 순간을 알차고 색다르게 보냈으니 충분히 의미가 있지 않았을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목표를 향해 노력했던 시간, 목표 없이 마냥 방황해본 시간도 모두 거쳐본 나는 이젠 그냥 현재를 살 수 있겠다고. 불안함 없이 오늘의 나를 직면할 수 있겠다고 말이다. 올가을엔 넓은 서울도 발길 닿는 대로 무작정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정해진 길이 없어서 더 자유롭게 나아갈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