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핍이 난(蘭)과 아이를 꽃피운다는 평범한 진실 앞에서

by 지성파파
이른 아침 거실에 은은하면서도 달콤한 향이 피어난다. 난이 어렵사리 꽃을 피운 것이다. 자주 보기 힘든 광경이라 경이로움을 가지고 아침잠에서 깨어난다. 아침에 일어나 첫 냄새가 난향이라면 무조건 맡고 볼일이다. 그 향이 멀리 퍼져 사라지기 전에...

부모가 된 보람이 느껴지는 때는 언제일까. 초등학교 입학 때, 대학 입학 때, 취업해서 첫 월급을 받을 때, 결혼식 때, 손자를 안겨줄 때... 모두 맞다. 부모는 자신의 아이가 삶의 여러 과정에서 나아가는 그 순간순간마다 보람을 느낀다. 아이들이 매 과정마다 자신의 모습으로 꽃피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거실에 난과 다른 식물들을 합쳐 대략 서른 개 정도의 화분을 관리한다. 개수가 많기 때문에 정성껏 물을 주고 하나씩 살펴주기에는 역부족이다. 반면 몇 개 안 되는 사무실의 난은 개별적으로 보살핌을 받아 잘 자라는 편이다. 정성 들여 키운 난이나 꽃나무가 시들시들 말라가다 생명이 다할 때면 마음이 안 좋다. 애지중지했던 반려동물을 떠나보내는 이들의 마음이 그러하였을까. 슬픔과 안쓰러움 사이의 감정선을 건드린 듯 마음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꾸역꾸역 올라온다. 왜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을까. 어떤 난은 10년 이상 옆에서 잘만 자라고 있는데...


사무실에서 난을 관리하는 유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잘 기르거나 잘 죽이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선물 받은 사무실의 난이 6개월을 견디지 못하고 버려지거나 죽는 경우를 본다. 대부분은 주인을 잘못 만났기 때문이다. 이는 난의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제때 물을 주지 않았거나 물을 너무 자주 주었을 때 발생한다.


난을 잘 기르는 방법은 무엇일까? 기름진 퇴비와 영양제가 특효약일까. 누구처럼 모차르트의 음악을 틀어주고 잎사귀를 자주 만져주는 것이 좋을까.


농사를 짓거나 꽃나무를 길러본 이들은 안다. 기름진 거름이나 토양이 작물이나 꽃나무에 미치는 영향이 실제는 미미하다는 사실을. 거름이나 수분도 필요 최소한의 범위 내에서 의미가 있지 넘쳐나면 오히려 해롭다는 딜레마를. 자연 속에서 자라는 대부분의 식물종들은 특별한 부가 요소 없이도 잘 자란다. 그것들은 자연 상태의 햇볕, 수분과 최소한의 양분만 있으면 된다. 그들의 DNA 속에 각인된 생체리듬이 생존에 필요한 최소 조건을 기억한다. 흔히들 "진화"라는 말로 표현하지만 "식물종의 선택" 또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연 속 식물과 달리 거실에서 키우는 식물은 자연의 법칙에서 벗어날 때가 많다. 인간의 욕망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더 잘"이라는 욕망이 부르는 대가는 이로울 수도 있지만 해로운 경우가 더 많다. 식물의 오래된 유전적 본성을 거스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난이 바라지 않는 과다한 영양요소나 수분은 성장이나 생존에 해롭다. 과도한 수분이나 영양은 뿌리를 썩게 만들거나 잎을 검게 마르게 한다. 십여 년 이상 난을 기르며 체득한 비법은 단순하다. 일정한 간격으로 물을 주는 것. 가끔씩 잎사귀를 만져주는 것. 함께 음악을 들으며 따뜻한 햇볕을 즐기는 것.


난의 본능적 선택을 믿고 그냥 지켜보는 것 이상 별다른 비법은 없다.



부잣집 아이들과 가난한 집 아이들 중 누가 사고칠 가능성이 높을까. 혹은 누가 더 성공할 가능성이 높을까. 쓸데없는 의문이지만. 다행히 이 분야에 관한 제대로 된 통계는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부자와 빈자의 기준 설정이 애매하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성공과 실패(사고)의 판단도 모호하기 때문이다. 주관적, 객관적이라는 수사가 붙고 통계학적 추론을 더하더라도 그 기준은 극단적 주관과 추상적 주관 사이의 문제일 수밖에 없다.


풍요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행복의 중요한 요소다. 하지만 부자가 자식을 잘 키우기 힘들다는 역설이 있는 걸 보면 그게 전부는 아닌가 보다. 부모가 되면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아이들을 위해 헌신적이 된다. 누군가는 밤잠을 줄이고 새벽 졸음을 참고 견디며 밥벌이를 하고, 누군가는 자존심을 팽개치고 굴욕을 참아가면서 월급을 받는다. 상당 부분 아이들을 위해서다. 아이들을 먹이기 위해서는 '문둥이 콧속에 들어있는 것도 빼온다'는 옛 얘기가 있지 않은가. 물론 말도 안 되는 과장된 표현이지만, 자식에 대한 부모의 간절함이 담겨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부모 세대와 요즈음의 아이들의 경제상황은 크게 다르다. 부모들은 대부분 결핍의 환경에서 자라났지만, 지금의 아이들은 대부분 결핍이 없는 환경에서 자란다. 양자 사이의 동기부여는 어떨까. 각기 상황마다 개별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성취동기는 부모세대가 더 강할 수밖에 없었다. 배고픈 환경, 부족한 경제력이 그들에게 마음속 무언가를 자극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은.... 우리 집 아이들을 보더라도 육체적 배고픔과 정신적 허기를 경험하지 않는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럴 필요가 없다. 바라는 거의 모든 것을 부모가 알아서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풍부한 먹거리와 미리 미래를 불안하게 보지 않아도 되는 현재의 풍요가 우리 아이들에게 바람직한 결핍 상황을 만들어주지 않는 것이다. 부모 세대가 겪은 결핍으로 인한 장점은 아이들에게도 유용한 삶의 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함에도 우리 부모들은 아이들의 결핍 상황을 스스로 참지 못하고 살아간다. 이런 측면에서는 오히려 부모가 문제일 수도 있겠다.


유명인사가 된 이들이 내뱉는 상투적인 문장이 있다.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의 8할은 결핍(부족함 혹은 가난)이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적당한 결핍을 가진 이들이 더 건강한 에너지로 잘 살아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과유불급의 상투성은 사람과 식물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진리임을 알 수 있다. 물과 비료가 과하면 난이 죽고,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는 풍족함은 의지력이 약하거나 동기부여가 안 되는 아이로 만들 수도 있다.


난을 키우는 것과 아이들을 양육하는 것을 동일한 차원으로 비교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각각의 주체성과 생존(성장) 본능의 본질은 비슷하지 않을까. 바라건대, 우리 아이들이 늘 배부른 상태에서 무기력하고 소극적으로 살아가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적절한 결핍이 주는 자연스러운 성취 본능과 동기부여 속에서 자신의 의지로 삶을 꽃피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이 넷을 낳고 기르면서 체득한 나름의 양육 비법 또한 단순하다. 약간의 결핍이 있는 필요 최소한의 상황을 제공하고, 가끔씩 아이들의 말에 귀 기울여주며 등을 다독여주고, 함께 집밥과 음악을 들으며 햇볕을 마주하는 것.


난의 본능을 믿듯이 아이들의 선택을 믿고 기다리는 이상 별다른 비법은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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