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의 등을 대하는 부모의 리추얼

가장 간지러운 곳은 손이 닿지 않는 곳이다

by 지성파파

1979년 어느 눈 내리는 겨울밤.

한지로 만들어진 문풍지는 바람에 울고 있었다.


이른 저녁을 먹은 아이들은 군고구마나 시원 달콤한 무를 먹으며 긴 밤을 지나고 있었다.

어쩌다 호빵을 먹기도 하지만 늘 한 개가 모자란 까닭에... 어머니는 늘 배부르시다고... 저녁을 많이 먹어 배고프지 않다고 하셨던 말씀을 진심으로 알아들었던 겨울 저녁.

육십 촉 백열등이 비추는 온돌방에서 누군가는 티브이를 보고, 누군가는 부모에게 등을 내밀고 있었다.

아이들은 순서를 정해 부모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빨간 내복을 입고서...


대부분은 어머니가, 어쩌다가 아버지가 긁어주던 등은 어찌나 시원하던지.

거칠고 까칠한 손길이지만 얼마나 다정하고 따뜻했었는지.

뜨끈뜨끈한 온돌 아랫목에서 들려주는 옛날이야기만큼이나 아련한 기억이다.


그 다정했던 손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눈꽃 날리던 겨울밤의 이야기 속으로 흘러갔을까.

마루까지 들치던 눈바람에도 평온하게 웃고 떠들며 밤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등을 긁어주던 그 손길 때문이지 않았을까.


매일 밤 등을 내밀었던 어린아이는 어느덧 네 아이들의 아빠가 되었고.


쉬이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그때가 그립다(그리워진다).



저녁을 먹고 노닐다 잠들기 전에 반드시 하는 리추얼이 있다. 초등학생인 막내 아이의 등을 긁어주고 다리를 주물러주는 스킨십이다. 이제 더 커버린 누나들과 형은 그런 요구를 하지 않는다. 부모가 동화책을 읽어주고 음악을 들려주거나 소소한 스킨십을 해줄 나이 때가 지나면,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요구(부모는 바라지 않는)를 하기 시작한다. 몇십 년 전 부모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래서인지 아빠의 밤 시간은 오롯이 막내의 독차지가 된다.


오르골 자장가의 선율이 내려앉은 방안.

어둠 속에서 "여기 긁어, 저기 주물러. 여기는 세게, 저기는 간지럽게." 까다롭게 주문하는 어린 갑질이 시작된다. 아빠에게는 하루의 어떤 순간보다 더 기다려지는 시간이다. 어쩌면 부모의 존재 이유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혹은 깨닫는) 시간이기도 하다. 하루 온종일 떨어져 있던 시간을 보충이라도 하듯이... 저녁 식탁에서도 말하지 못했던 화젯거리가 쏟아져 나오는 순간이기도 하다. 같이 책을 읽거나 놀이를 하면서도 하지 못했던 마음속 얘기를 하고 싶어 지는 그런 시간. 의식이 무의식의 경계로 넘어가는 순간을 함께하는 무한한 신뢰의 시간. 아빠는 아이의 등을 긁어주었다.

잠들기 직전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아이들은 부모가 자신에게 주었던 영혼의 끈을 찾지 않을까. 엄마로부터 분리될 때 탯줄의 기억을 찾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영원한 회귀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는 늘 안식처를 바라고 그곳을 향해 마음속 항해를 떠나곤 한다. 그 출발지가 부모의 손길로 인해 고요한 항구가 되는 것이다.


까다로운 요구에 오래 걸릴 것 같은 맞춤형 주문은... 십여분이 채 안되어 아이의 숨결이 고르게 되면... 조용히 머리를 쓰다듬고 볼 뽀뽀하는 마지막 절차로 마무리된다. 아이는 부모와 연결되는 만족감에 부모로부터 보호받고 있다는 안정감에 천사 같은 얼굴을 하고 잠의 나라로 빠져든다. 부모는 자신의 또 다른 영혼이 자라고 있다는 신비함에 말할 수 없는 사랑이 싹틀 수밖에 없다.



네 아이가 커나가는 일정 나이 때 아빠는 밤마다 아이들의 등을 긁어주었다. 등이 간지러운 것도 유전인 건지 모르겠지만, 아이들은 저녁이면 등을 보여줄 때가 많았다. 하루의 아주 작은 시간을 투자하는 소소한 행위이지만 아빠와 아이들의 마음속에 새겨지는 바는 크다. 스킨십의 소중함을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누군가에게 등을 맡긴다는 것은 근본적인 믿음 없이는 불가능하다. 오죽하면 늘 등 뒤를 조심하라는 말이 있겠는가. 등을 기대고 마음을 의지하는 이는 가장 신뢰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아이들의 등을 긁고 두드려주는 행위 속에서 부모의 영혼 또한 안식과 평온을 얻는다.

부모가 되면 누구나 느끼는 것이지만, 갓난아이의 젖먹이 과정은 얼마나 졸렸던가.
그 젖먹이가 주는 마음의 위안은 얼마나 따뜻하고 사랑스러웠던가.
그 시간 눈꺼풀은 지구의 무게만큼이나 무거우면서도 부모를 행복하게 하지 않았던가.
모유수유에는 트림시키는 과정이 생략되지만, 분유를 먹이는 갖난 아이들은 어떠했던가.
어깨에 기대고 등을 두드려주는 행위 속에서 엄마 아빠의 손바닥은 더할 나위 없이 신중하면서도 그 무엇보다도 다정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두드려주고 긁어주는 행위는 사랑일 수밖에 없다.


크게 의미는 없지만, 단순하게 주물러주는 행위보다 더 다정한 행위는 긁어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라. 내 등을 긁어주고 내가 긁어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핏줄을 나누거나 부부 혹은 연인이 아니면 결코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바로 알 수 있다.


부모가 아이의 등을 대하는 행위는 자장가를 불러주는 것과 같다. 작은 어깨를 주물러주고 간지러운 부분을 찾아 긁어주다 보면 아이는 어느새 꿈나라로 가고 없다. 부모 또한 행복한 꿈을 꾸게 된다.


성인이 되어서도 누군가가 내 등을 두드려주고 간지러운 부분을 긁어주기를 원할 때가 많다. 가장 간지러운 곳은 대부분 손이 닿지 않는 곳이다. 제아무리 팔이 유연하고 곡선처럼 휘더라도 손가락이 닿을 수없는 부분이 꼭 있다. 요가를 통해 단련된 소수를 제외하고는 우리의 인체공학상 어쩔 수 없는 한계다. 그때 물론 효자손이 옆에 있다면 좋겠지만, 물리적인 도구로 인한 시원함은 따뜻한 손길에 비할바가 아니다.


살다 보면 내 영혼의 언저리나 마음속 깊은 곳의 간지러운 부분을 누군가 긁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꼭 있다. 개인의 멘탈이나 마음가짐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영역의 그 무엇. 등이나 허리의 닿지 않는 곳처럼 스스로는 해소할 수 없는 갈증이지만, 중요한 타인의 위로나 애정 어린 스킨십은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다.


아직은 누군가 나에게 등을 맡길 시간이 있다는데 감사함을 느낀다. 더하여 이들이 나로부터 떠나갈 때 느끼는 허무함은 이 삶이 다할 때까지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가끔씩 이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거나 도와줄 수 있을 때 부모라는 존재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삶의 매듭을 지어나갈 때 잘 풀리지 않는 순간이 오면... 어릴 적 자신의 등을 내밀었던 순간처럼 부모에게 응원이나 격려의 손길을 내밀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들의 등을 긁어주는 시원함을 다시 느끼게 할 수 있는 순간이 있다면 그런 상황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매 순간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되지만. 가끔씩은 부모의 존재 이유를 소환해주는 그런 리추얼이 그리워질 때가 올 것이다. 어린아이의 작은 등과 고사리 같은 손을 어루만지는 평화의 시공간에서... 내가 부모님에게 드렸던 행복의 기억을 이제는 아이들을 통해 내 맘속에서 담고 싶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갑자기 등이 간지러워진다. 하필이면 손이 닿지 않는다. 누가 내 등의 간지러움을 해소해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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