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의미 있는 말이었지만, 지금은 여러 가지 사정상 그렇지 못하다. 한집에서 3대가 함께 거주하는 경우가 드물고, 마을 공동체가 신뢰할 수 있는 어른들로만 구성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대신 각각의 동네에 있는 공공도서관이 그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아이들은 각 마을의 도서관에서 놀고 책을 읽으며 친구를 사귄다. 어찌 보면 도서관이 책만 읽는 공간이 아니라 일종의 "놀이터와 안전지역"의 기능을 겸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 가지 더한다면 저마다의 꿈을 키우는 "꿈 공작소"역할도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공공도서관이 2월 중순부터 일제히 문을 닫았다. 이는 코로나 바이러스 확산 감염을 막기 위한 특단의 조치다. 아이들은 벌써 한 달이 넘게 도서관에서 책을 보거나 빌리지 못했다. 꼬마 독서광들은 새책을 2주 정도 접촉하지 못하자 몸이 근질근질 해지고 일종의 금단현상까지 경험한다는 얘기를 했다. 꿈속에서도 무슨 책인가를 읽고 웃었다는 얘기를... 그래서 아파트 단지 내 작은 도서관에서 매주 책을 빌려보던 아이들이 다시 책을 찾기 시작했다. 집안에서만 할 수 있는 소소한 놀이문화에 식상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읽을만한 책을 구해오는 것이 아빠의 새로운 임무가 되었다.
다행히 근무하는 조직의 구내 도서관은 문을 열어두고 있었다.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가보니 전에는 빽빽이 차있던 서가가 허전해졌고,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주제 쪽은 아예 텅텅 비기 시작했다.
사서직원분이 하는 말... 갑자기 2월 중순부터 아이들을 둔 부모들이 많이 방문해서 다수의 도서를 대출해갔고... 덕분에 평소에 책을 돌보듯이 하던 직원들도 덩달아 책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말랑말랑한 에세이와 대부분의 소설류가 품귀현상을 빚고 있다는 설명과 함께... 사서직원과 대화를 끝내고 열 권이 넘는 도서를 대출했다. 가방은 무겁고 어깨는 아팠지만 마음은 가벼웠다. 일단 이번 주 미션도 성공!
도서관이 문을 열지 않자 괴로워하는 것은 아이들뿐만이 아니었다. 어른들은 아파트 단지 내 대부분 커뮤니티 공간이 문을 닫는 바람에 골프도 헬스도 할 수 없고, 산책도 하루 이틀 하다 보니 슬슬 지겹고.... 집에 종이신문은 없고, 스마트폰은 자꾸 쳐다보니 코로나 때문에 화만 나고, 그것도 자주 보다 보니 눈만 피곤하고... 혼술을 즐기자니 면역력에 도움이 안 될 것 같고... 오래간만에 부부간에 다정한 대화를 시도했으나 대부분 싸움으로 끝나고... 결국은 마음의 안식을 얻고자 찾은 것이 다시 책이었다.
누군가는 예전에 보다 던져버린 도스토옙스키의 명작들을 꺼내 들기도 했고, 다른 누군가는 책꽂이에 꽂혀있는 법정스님이나 신영복 교수의 저서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친구 중 한 명은 "어린 왕자"를 다시 읽었더니 자신의 삶이 새롭게 보이더라는 믿지 못할 얘기도 했다. 책이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 마법을 여러 사람이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코로나블루 때문에 러시아 실존주의 문학이 위안을 준다는 것도 알 수 없는 아이러니다.
코로나 사태로 인해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못하고 모여서 놀지도 못하고 있다. 집안은 심심하고 답답하고 게임마저도 마음껏 할 수는 없다. 아이들에게 남은 최후의 소일거리는 공부가 아니라 독서였다. 집에 있는 책들은 대부분 아이들의 손때가 묻어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두세 번씩 본 책이 많아 아이들은 신간에 목이 마른다. 하지만 어떤 부모도 아이들이 원하는 책을 모두 사줄 수는 없다. 대부분은 한번 보고 다시 쳐다보지 않는 책들도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공도서관의 역할이 크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는 다양한 양서를 쌓아두고 있는 곳이 동네 도서관이 아니면 어디 있단 말인가.
우리 단지 내 작은 도서관의 사서분은 아이 둘을 둔 엄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에게 여느 엄마들처럼 살갑게 대해주신다. 드나드는 많은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얼굴과 이름을 대부분 기억하고 있다. 부모들을 호명할 때 "누구 아버님, 누구 어머님"으로 부르시는 걸 보니 정말 그렇다. 마을 도서관은 아이들에게는 도서관으로, 공부방으로, 옹달샘으로 존재한다. 놀이 중간중간에 물을 마시거나 잠시 휴식을 취하러 오는 걸 보면...
늦은 취침과 너무 여유로운 기상시간 말고도 아이들에겐 시간이 넘쳐난다. 아이들은 이 시간을 무엇을 하며 보낼까 고민 중이다. 이번 기회에 공부라도 조금 더 했으면 하는 바람은 있지만. 그것은 부모의 상상 속의 현실일 뿐. 영화관에도, 피시방에도, 놀이터에도 가지 못하는 아이들의 유일한 해방구는 다름 아닌 책일 수밖에 없다. 교육부 담당자나 선생님들에게 관심사인 연간 수업일수도 이들에게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 현재 학교를 가지 않는 이 시간들이 지겹지만 의미 있는 것이다. 개학이 추가로 연기되어 아이들이 가진 시간의 총량은 더 늘어날 예정이다.
이미 많은 책을 읽어버린 심심한 아이들은 책 읽을 시간이 많아지면서 선택의 범위가 더 넓어졌다. 특히 만화가 그렇다. 만화방에서 본 것을 제외하고도 이미 도서관에서 허영만의 식객이나 와인, 커피 등에 관한 만화를 섭렵했던 아이들이다. 평소에는 관심대상도 아니었던 동양고전이나 중국의 4대 기서를 만화로 그린 책들이 아이들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기껏해야 어린이 명심보감 정도를 재미 삼아 읽었던 아이들에게 어려워 보이는 책을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만화책은 가뭄의 단비와 같았다. 심지어 교훈적이면서 판에 박힌 스토리들이 재밌고 배울 점이 많다는 얘기를 하는 것을 보면.... 아이들은 충분히 심심해져야 할 이유가 있었다.
때마침 구내 도서관에는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는 교육용 만화들을 많이 비치하고 있었다. 우리 집 아이들은 아빠가 주말마다 빌려오는 만화 전집을 하나둘 격파하기 시작했다. 5~6권짜리부터 10~20권이 넘는 만화까지 아이들의 주말은 거실에서 만화를 보며 라면을 먹는 풍경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거실을 도서관이나 만화방으로 만드는 의도였다면 절반은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구내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빌려오는 책은 한계가 있다. 그 공간이 애초부터 아이들을 위한 공간은 아니였기에... 아무래도 아이들에게 권장할 수 있는 것보다 성인용 책이 더 많은 까닭이다. 누가 뭐래도 아이들에게는 자신들의 원하는 책을 서가에서 마음껏 꺼내볼 수 있는 동네 도서관이 최고인 것이다.
아이들도 부모들도 책의 안부가 궁금하지만, 그 책이 살고 있는 도서관의 안부도 정말 궁금해졌다. 불 꺼진 도서관을 조용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아이들로 가득한 소란스러운 풍경이 그려진다. 나지막이 들려오는 두런두런 얘기 소리와 창문으로 비치는 따뜻한 햇살, 여기저기서 책장을 넘기는 작은 손가락들... 그 공간에서 또렷하게 집중하는 어린 눈망울들... 그 아이들을 바라보는 사랑스러운 부모의 눈길까지....
하루빨리 아이들이 찾아와 책장 넘기는 소리로 꽉 찬 동네 도서관을 다시 보고 싶다. 아이들이 흥미와 설렘을 느끼며 책 읽는 즐거움을 만끽하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다. 그래서 책의 안부가 진정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