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에서 가장 큰 덩어리.
크기는 작지만 그 무게감이 여느 사람들 것 못지 않은 그것.
대단하게 빵빵하다가도 한순간에 쪼그라드는 그것.
원하지 않아도 작동하고 마는 그것.
어쩔 때는 내것이 아니라 생각되는 그것.
자꾸 바깥으로 나가 돌어오기 싫어하는 그것.
쉽게 바뀌지 않는 그것.
내 몸에서 가장 큰 덩어리.
그건 '생각 덩어리'이다.
며칠 동안 미치는 줄 알았다. 명절 전부터 9월 말까지 제출해야 하는 과제들 때문에 머릿속이 복잡했다. 무언가 만들거나 그리지 않아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몸은 일을 하고 있었다. 작품을 만들 때 8할은 생각이 하는 일일 것이다. 생각만 자리를 잡으면 작업에 속도를 내는 것은 까짓것 생각대로 하면 될 일이다.
생각이 막히면 작업도 멈춘다. 이 생각이란 놈은 참 신기하게도 자생적이고 자발적이지만 한번 막히면 골방을 파고들어가 나오질 않는다. 작업을 하는 도중에도 생각은 끝도 없이 자기 일을 한다. 내가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붓질을 하고 있는 건지 한참이 지나서야 과정을 보고 작업을 하고 있었구나 생각한다.
SNS에 올라오는 누군가의 일상은 내게 작업 소스를 안겨준다. 마음에 드는 사진이 있거나 글이 있으면 저장했다가 내것으로 만들 수 있을지를 고민하기를 여러날이다. 이번 유화 과제에 그리기로 한 사진은 인스타그램에서 팔로잉 하고 있는 어느 작가의 글에서 가져왔다. '너무 좋은 여름'이라는 짧은 코멘트와 함께 풀들이 무성한 먼발치에서 산책로를 바라보며 찍은 사진이었다. 산책로 옆 연못은 작은 하늘이었다. 정돈되지 않은 그 무성함이 좋아서 언제고 기회가 되면 그리고 싶었다.
작업 기한이 길지 않기 때문에 말려가며 다음 작업을 기다려야 하는 유화의 특성상 조바심이 앞섰던 게 사실이다. 밑색을 칠하고 거실 창문 밖에 있는 철제 난간에 캔버스를 올려 건조하는 데 묘사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이제 겨우 유화 다섯번째 캔버스를 바라보는 촛자 페인터는 망설임이 끝도 없다. 촛자 페인터는 초보라는 사실을 잊은 체 그저 잘 그리고 싶었나보다. 잘 그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는 순간 속도는 느려지고 선택은 방향은 잃어 가슴이 답답하게 조여지는 것 같았다.
'잘 그려야지' 네 이녀석 나가! 잘 그리는 게 목적이 아니라 배운 것을 연습하고 적용해서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는 데 의의를 두는 거야. 참 신기했다. '잘 그려야지' 녀석이 생각에서 나가는 순간 나는 자발적 동기부여를 하며 속도를 내고 있었다. 그림은 더 잘 그려지는 듯했다. 촛자가 잘하려고 욕심을 부리니까 속도는 느려지고 이걸 왜 해가지고 한탄만 일삼아 터져나오는 거다. 배우는 사람이 잘하고 싶은 욕심을 가질 수는 있지만 그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끝장을 보기 힘들다는 걸 알게 됐다.
아침에 꼬맹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 돌아오는 데 며칠째 새벽에 잠든 것이 문제였을까. 핑 돌면서 퀭한 눈을 비비적거렸다. 동네 커피숍에서 달달한 카라멜 마끼야또를 손에 들고는 마무리 작업을 할 생각에 발길을 재촉해 집으로 돌아오는데 '내 생각 덩어리는' 벌써 캔버스 앞에 와 앉아있다. 발빠른 녀석, 넌 항상 그랬지. 암 그렇고 말고. 해야할 일을 끝내지 못하면 밤잠을 몰아내고서라도 버티며 해내는 너잖아. 제일 어려운 하늘이 남았다. 연못에 비친 하늘도 잘 표현해야 하는데... 큰일이었다. 그래, 방법을 모르니 색을 배합해 놓고 붓질을 빡세게 해보자. 마음 먹으니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어쨌든 하늘을 그려 작품을 완성했다. 대단한 만족은 아니지만 다양한 방법을 구사했고 유화를 그릴 때 유의해야 할 사항들을 알 수 있었다.
낭만주의 화가 들라크루아에 대한 프랑스 어느 소설가의 평을 인용해본다. "미켈란젤로보다는 데생이 못하고, 루벤스보다는 구성이 못하지만 들라크루아에게서는 두 화가를 뛰어넘는 강렬함과 환상을 느낄 수 있지요." 유명한 화가는 데생, 구성, 색채, 표현 이 모든 면에서 최고여야만 하는 건 아닐 것이다. 답이 있는 수학 문제도 푸는 방법은 여러가지일 텐데, 하물며 유명한 화가도 명확한 답을 확신할 수 없는 예술에서 초보 페인터가 너무 과한 욕심을 부렸다. 생각없이 그렸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미친듯이 생각하며 그렸다는 게 진심이고 사실이다.
작업을 끝내고 나니 생각이 가벼워졌다. 대상을 옮겨 또 다른 생각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