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또이또이 Nov 30. 2021

나의 첫 정물 유화, 스마일 펌킨

내 화병에는 꽃이 없다. 그 흔한 조화도 없다. 구석에 처박혀 있던 화병을 꺼내 무엇을 꽂을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길고 얇은 것을 찾았다. 주방에 있었다. 요리할 때 쓰는 나무 젖가락, 그나마 강렬한 색깔을 갖고 있는 실리콘 뒤집개 그리고 반짝이는 은색 국자. 이렇게 세개를 꽃병에 꽂았다. 화병 주둥이는 넓지만 목 부분이 잘록해 더이상 꽂을 수 없었다. 주방에서 찾은 나의 일상은 나무 젖가락, 뒤집개 그리고 은색 국자. 아이 방으로는 들어가지 않았다. 내 일상이니까.


내 일상에 화병은 그리 익숙한 물건이 아니다. 누군가의 대단한 일을 위해 꽃을 선물해 보긴 했지만 자신을 위해 꽃을 사본 적은 한번도 없다. 남편과 연애시절 그리고 결혼해서 두어번 꽃을 받아본 적은 있지만 꽃은 스페셜 그 자체이지 일상은 아니었다. 그런 내가 화병을 꺼내 꽂을 수 있는 게 고작 주방에서 쓰는 요리 도구가 전부라니. 우울한 감이 살짝 몸으로 들어오려고 할 때 차단시켰다. 꽃병에 주인은 분명 싱싱하게 살아있는 꽃이겠지만 '일상'을 담는 도구로 꽃병을 선택한 이상 그것의 용도는 달라져야 한다. 무언가 꽂아서 보기 좋은 물건으로 만들어 낸다고 생각했을 때 본연의 쓸모는 살려두고 내 변변치 않은 일상을 꽃처럼 포장 해 줄 수 있는 대단한 임무가 주워지는 것이다.


나의 일상 중 주방에 머무르는 시간 외에 난 무엇을 하고 있나. 그리고 그중에 주방 도구의 평범함을 상쇄시킬만 한 뭔가를 찾아봤다. 역시 붓이었다. 화병에 꽂을 수 있으면서 지루하고 건조하며 빨리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되는 요리와 상반되는 나의 진심이 담겨 있고 나의 온 시간을 쏟아도 좋을 만큼의 그것들은 역시 붓이었다. 뒤집개와 국자의 탄탄하고 육중한 몸을 이길만 한 건 역시 빽붓이 제격이다. 튀김할 때 자주 쓰는 나무 젓가락의 단단함을 이길만 한 것은 단단한 것이 아니라 부드럽고 물을 많이 머금을 수 있는 둥근붓이리라.


즐겨 읽는 책을 서너권 쌓아 놨다. 그리고 그 위에 책과 곁들일 수 있는 커피를 잔에 담았다. 다섯살에 꼬마, 아홉살에 정신없이 성장하고 있는 아들. 차분하게 앉아서 그림을 그리거나 붓글씨를 쓸 수 있는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 주부의 일상에 붓과 책과 커피라니. 삐뚤빼뚤 엉성하게 난 이빨을 드러내며 흐흐흐 웃고 있는 시커먼 눈의 해골이 내모습을 비웃는 것 같다. 주부 경력 10년 이상이면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사람 미치게 하는 일인지 잘 알게 된다. 결혼 전에도 가만 있지 못하고 이것저것 배우는 것에 환장했던 나는 관심의 사정거리 안에 들어오면 뭐라도 던지고 본다.


화병에 꽂힌 주방도구와 붓 그리고 책과 커피잔의 다소 미스매치 상황을 비웃기라도 하듯 내려다 보는 해골을 할로윈데이 스마일 호박이 조소하고 있다. 다 괜찮아. 아무려면 어때. 화병에 꼭 꽃을 꽂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그 쓰임이 다르면 좀 어때. 그림을 붓으로만 그리나. 유화 나이프가 없으면 뒤집개로 문질르면 안될까. 국자로 물감을 떠서 던지듯 그려도 멋지잖아. 붓질 한번 안하고 생각만 하면 공장에서 마구 찍어대는 현대미술 작가들도 수두룩하잖아. 나라고 주방에서 요리만 하란 법 있어? 마음껏 비웃어. 나도 비웃어 줄께. 뭐든 꿈보다 해몽이 더 좋은 법.


그렇게 그려낸 나의 첫 정물 유화.


인터넷에 '정물'이란 키워드를 검색하면 수많은 자료들이 검색된다. 배우는 과정에서 뭐든 잡고 그릴 수 있는데 쉽지가 않았다. 풍성하고 멋스러운 꽃병은 나의 것이 아니었고 투박한게 마음에 들었던 큰 항아리의 인테리어 소품들 또한 내것은 하나도 없었다. 과일을 그리고자 했지만 사과는 손에 들어오지 않았고 바나나는 맛이 없었다. 그 맛이 느껴지니 쉽게 붓질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교수님 말씀대로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었고 내것이 아닌 그림을 그린다는 건 점점 어려운 길로 들어서는 느낌이었다. 무엇을 하든 대상과 나의 관계는 무척 중요하다는 걸 이번에 또 한번 느끼게 된다.


아이들이 집에서 나간 후 볕이 잘 드는 창가에 밥상을 폈다. 그리고 그 위에 화선지를 두장 포개어 올렸다. 집에 있는 수많은 정물 중 화면에 담을 수 있는 정물로 화병을 선택했다. 사용하지 않아 구석에 쳐박혀 있던 화병인데 나름 자리에 놓이니 그럴 듯했다. 그리고는 순차적으로 꽂을 수 있는 것을 생각했고 그러다 보니 또 답답한 내가 보이는 거다. 그걸 해골이 웃어주고 그런 현실을 또 할로윈데이 스마일 호박이 비웃어 줬다. 속이 후련했다. 그림을 그리는 중에도 밝은 부분과 어두운 부분의 중간 정도에 웃고 있는 펌킨을 놓은 것이 너무 만족스럽다 느끼기도 했다.


짧은 시간 집중해서 그린 그림은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에 들었다. 구조가 너무 식상한 것 아니야. 재미없는 재료들이 무슨 이야기가 될 수 있겠어. 인간의 유한한 삶의 상징 해골은 너무 식상한데. 스마일 호박이 그런 의문에 대수롭지 않다며 크게 웃어준다. 정물이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답답한 그림이라 생각했는데 정물은 정지된 것을 그리는 동안 마구 요동치는 바다를 품고 있는 것처럼 넓고 깊었다.


이은하, 스마일 펌킨, 2021, oil on canvas, 53 X 41cm



#나의첫정물유화

#내일상이그렇지뭐

#비웃지마나그림그리는주부야

이전 20화 테스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