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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이또이 Dec 08. 2021

하루는 꽤 근사했다

높고 푸른 하늘, 춥지 않을 정도의 공기의 움직임이 좋았던 딱 알맞은 오늘이었다. 그런 하루도 저물어 간다. 요즘 보통의 날은 아침 나절에 수업을 듣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책을 읽는 등 움직임이 적은 무언가를 하기 나름이었는데 오늘은 힘차게 두 다리로 패달을 밟으며 늘 머물던 곳에서 벗어나봤다. 그래봤자 반경 1킬로도 되지 않는 가까운 곳이지만 이런 산뜻한 날씨는 기분 만큼은 먼 교외로 나를 데려가는 듯 했다. 오늘따라 친하든 친하지 않든 오가며 사람들을 많이도 마주쳤다. 거리에 서서 사소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 늘 되돌아 가던 길을 외면한 채 산책하며 갈 수 있는 길을 선택했다.


생각하는 것은 머리만이 아니다. 가슴과 살갗 그리고 손발뿐만 아니라 다리를 통해서도 우리는 감각하고 생각하고 공부하게 된다. 그런 사실을 우리는 산책(散策)을 하면서 깨닫게 된다. 산책의 '책(策: 채찍 책)'은 계책(計策)이나 책략(策略)의 책(策)이라서 사색(思索)의 색(索: 찾을 색)과도 그 뜻이 통한다. 책(策)은 채찍이고 지팡이인 동시에 생각을 꾸미고 머리를 쓰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산책은 대책을 생각하고 사색을 하면서 내딛는 걸음걸이라는 뜻이 될 것이다.


그렇다.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면서 생각에 잠기면 그 걸음걸음이 머리에 작용하여 생각의 매듭을 엮어나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 발걸음의 율동이 생각의 율동을 거들고 나서는 것이다. 그러다가 거꾸로 생각의 율동이 발걸음의 율동에 변화를 준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산책을 나가 걷다 보면 불현듯이 발바닥에 닳는 흙의 촉감마저도 생각을 일깨운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다리가 머리와 단짝이 되어서 생각을 엮는다. 그래서 우리는 다리로도 생각하고 공부하게 된다. ... 사람은 다리로 걸으면서도 공부한다. - 김열규 선생님의 <공부> 중 -


김열규 교수님은 <독서>라는 책으로 살면서 독서가 주는 기쁨이 얼마나 큰 것인지 알게 하시더니 이번에는 <공부>라는 책으로 온몸으로 감각하며 공부하는 방법을 알려주신다.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을 '감각하는 사람' 혹은 '공부하는 사람'으로 바꾸어도 좋다는 말씀은 그만큼 공부는 특별하게 하는 게 아니라 공기를 마시듯 오늘을 살아가듯 그렇게 사소하게 하는 것임을 일깨워주신다. 평생을 공부하며 살아간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알려주신다. 아직 멀었다. 그 깊은 뜻을 온전히 알려면 더 익어야 할 것이다.


약속이 있었다. 비가 주룩주룩 계속 쏟아지던 지난주에 있던 약속이 미뤄져 '오늘 만날 수 있어요?' '날이 너무 좋아요' 가붓하게 약속을 잡고는 기분 좋은 공기를 가르며 장소로 이동했다. 오늘은 머물기보다 움직이고 싶었던 건지 자전거를 누가 뒤에서 밀어주듯 속력을 내는 데 그리 큰 어려움이 없었다. 뒤를 돌아볼 정도로 부드럽게 나가고 있었다. 굉음이 울리더니 파란 하늘로 하얀색 연기가 길을 만든다. 근처 비행장에서 행사가 있었던 걸까 수십분은 그렇게 하늘에 그림을 그렸나보다.


덕분에 자전거를 멈춰 하늘을 올려다 보는데 창공에 흩뿌려지는 보라색 연기의 흔적을 볼 겨를도 없이 넓은 잎의 플라타너스 나무가 눈으로 가득 들어왔다. 아름답다. 가만히 서서 나무를 바라봤다. 굵고 쭉쭉 하늘 높이 뻗은 가지들에 얇은 나뭇가지가 연이어 올라가고 그 끝마다 넓은 플라타너스 잎이 바람을 느끼며 춤추는 모습에 잠시 넋이 나갔다. 틈틈이 빛이 새어 들어와 반짝이는데 나의 눈은 촬영 카메라가 되어 순간을 기록하는 것처럼 긴장하고 있었다. 색을 섞으면 이렇게 섞어야 할까. 고동색은 더이상 나무 색이 될 수 없다는 걸 느끼는 요즘이다. 덩치 큰 녀석이 어쩜 이렇게 고운 연녹색 옷을 걸쳤을까. 티타늄 화이트를 섞어 마치 내가 큰 그림 속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유유히 빠져들게 만든다. 멀리 있는 잎은 블러를 줘야지. 가까운 잎은 짙은 색을 띠지만 검정을 덜어내고 순수 녹색에 채도를 조금 낮출 뿐 더이상 건드리지 말아야지. 플라타너스 터널을 지나는 동안 갖가지 나무 기둥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언젠가 캔버스에 옮길 생각으로 어떤 느낌을 표현할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흥분되는 날이구나. 오늘은 날씨가 주는 선물이 과할 정도로 많은 날이구나.





약속 장소에는 외부 테라스 구퉁이에 햇볕이 들어 남겨진 자리가 하나 있었다. 시간이 지나 아주 조금 그늘이 졌기에 우리는 그곳에 앉았다. 오랜만의 조우라 마냥 반가웠다. 언니는 나보다 열 살 이상 많다. 하지만 묻지 않는다. 말이 통한다는 건 나이도 성별도 사회적 지위도 다 불문하기 때문이다. 그런 관계를 그리워했고 우린 그렇게 친구라 하지 않아도 만나면 좋은 사이가 되어 있었다. 언니는 만날 때마다 아주 조금씩 자신을 보여준다. 오늘은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을 포기하고 시간이 지나 다시 공부를 시작했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갖은 경험을 한 뒤에 하는 공부라 그 깊이는 젊을 때 하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말해준다. 고등학교에서 대학교에서 또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젊을 때 하는 공부는 선행학습에 불과하다는 말이 여직 여운을 남기며 마음에 남아있다. 가장 좋은 공부 방법은 꾸준히 조금씩 계속 이어 나가는 거라고...


꼬맹이를 데리러 어린이집으로 향하는 자전거는 빵집 앞에 멈췄다. 지금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 아이들을 잘 돌보는 일. 그리고 가정이 평안하도록 두루두루 살피는 일. 하나 더 보태자면 앞에서 말한 몇가지 중요한 일에 누가 되지 않을 정도의 에너지를 나의 성장에 쓰는 일. 괭음을 내며 창공을 날았던 화려한 전투기는 이제 하늘에 없다. 누군가의 마음에 기분 좋은 바람을 불어 넣었던 플라타너스도 곧 짙은 갈색으로 떨어져 사라질 것이다. 짙고 푸르렀던 오늘의 하늘도 빛을 잃어 어둠 속으로 숨어 들어간다. 모든 사물은 어둠속에 사라진다. 그런데 우리의 정신은 그러는 중에도 살아있어 빛을 낸다. 나도 그렇다. 이 글이 그렇다. 그리고 나의 그림이 그럴 것이다.



#오늘은

#산책을하고

#사람을만나고

#생각을하고

#공부를하고

#참좋았던기억을

#기록으로남길수있어

#행복한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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