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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ke Oct 28. 2019

부당한 지시에 따르는 우리의 자세

사회생활의 하수가 전하는 생존기

 입사하고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하루는 내가 따르는 부장님이 TF 팀을 구성한다고 하면서 보고서 하나를 만들어 보라고 하셨다. 그 팀에 속하게 된 사람은 나를 비롯한 동기들 3명이 더 있었다. 보고서를 작성하다 보니 양도 많고 거의 논문 수준으로 설문과 더불어 양적 분석이 들어가는 꽤 품이 많이 들어가는 작업이었다.

 

 동기들과 같이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이게 왜 필요한지, 이 시점에 이게 무슨 일인지 궁금은 하지만 물어볼 수 있는 위치도 아니었고 해서 묵묵히 했었다. 물론 자신의 개인 업무는 하면서 시간 외 근무 또는 집에서까지 해야 하는 일이었다. 한 창 바쁜 시즌이기도 해서 점점 우리의 불만과 의구심은 커져갔다. 보고서 작성을 통으로 맡긴 것이 아니라 개별적으로 양을 할당해줘 우리는 이 보고서의 정체가 무엇인지 한참 후에야 파악할 수 있었다. 즉 바쁜 시즌이라 동기들은 만날 여유가 없었고 자신의 부분만 채워서 부장님께 갖다 주니 전체적인 보고서의 내용을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우리는 모두 보고서를 제출하고 바쁜 시즌이 끝나고 연말이 되어 동기들끼리 함께 모이는 자리를 가졌다. 평소 바른 소리 잘하는 동기 하나가 드디어 그 보고서의 정체에 대한 문제를 수면 위로 꺼내놓았다. "그 보고서 말이야. 부장님 승진을 위한 보고서 같지 않았어?" 그러자 잊고 있었던 보고서에 대한 그 문제가 그 날의 화두가 되었다.   

 

 보고서에 대한 단편적인 증언들이 한 곳으로 모아졌다. 한 동기가 "내가 알기로 그거 부장님 보고서도 아니더라고." 하였다.  우린 이구동성으로 "그럼 누구?"라고 하니. "그거 사실 부사장님 보고서인데 자기가 개인적으로 부탁받고는 우리한테 떠넘긴거야". 사실은 그랬다. 부사장이 개인적으로 모부장에게 부탁한 것을 모부장은 회사차원의 일이며 이 보고서는 우리한테도 도움이 될 거라는 명분으로 우리에게 넘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서 의문이 생겼다. 부사장은 이미 승진이 끝나 사람인데 즉 더 올라갈 곳도 없는 분인데 무슨 보고서를 작성한단 말인가..?

 

 그러자 조용히 차를 마시던 한 동기가 숨을 깊게 들이쉬며 딴엔 비밀 첩보처럼 조심히 입을 열었다. "그거 사실은 부사장 마누라를 위한 보고서야. 내가 사무실 들어가다가 부사장이랑 부장이랑 이야기하는 거 얼핏 들었는데 부사장이 부장한테 엄청 고마워하더라고." 우리는 당시 입 밖으로 욕을 해대며 울분을 토했고 그 보고서를 작성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에 대한 간증이 이어졌다.  

 

 정리하자면 부사장은 같은 업계에 부인이 근무하고 있고 뒤늦게 부인이 승진을 하려는 마음을 먹고 승진을 위한 경주마처럼 질주하던 상황이었다. 남편으로서 우리 부사장은 외조를 해주고 싶었고 부인에게 보고서는 자신이 해결 하마 했을 것이다. 부인의 보고서는 그렇게 부사장에게, 부사장은 부장에게, 그 부장은 조직의 최말단이자 감히 거절할 수 없는 우리에게 그럴듯한 명분으로 강요 같은 부탁을 한 것이었다.  

 

 그 이후로 우리는 각기 다른 부서로 이동하면서 만남이 뜸해졌다. 그래도 동기인지라 정기적으로 만나고 있다. 일 년에 한 번 만나지만 항상 레퍼토리는 정해져 있다. "그 쓰레기 같은 부장으로" 시작하는 험담이다. 그리고 지금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은 그 당시에는 참 많이 있었다는 말도 함께 잘 버텼다는 자기 위안 비슷한 것을 나누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 부장을 비난하지만 정작 마음속에는 그리 큰 혐오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젠 서로 물리적으로 멀어져 공유하는 기억과 경험이 업데이트되지 않아 예전 일들만 되씹는 것이다. 게다가 좀 지나고 보니 보고서나 할 일 미루기 같은 갑질류의 것들이 빈번하게 이루어짐을 목격하고 그 건은 그리 큰 일도 아니라는 여유가 생겼을 수도 있다. 고백하자면 우리는 사실 이 보고서가 우리를 위한 또는 조직을 위한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처음부터 짐작하고 있었다. 다만 "이건 정확히 무슨 일인가요?" 라던가 "이걸 왜 우리만 해야 하죠?"라고 되물을 용기가 없어서 모른척하고 있었다. 또는 보고서로 인정받기 위한 나름의 동기들끼리의 경쟁의식도 없지 않아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렇다고 부당한 지시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한 나를 자책하지는 않는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고 해도 못할 것 같다. 게다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나한테 개인적으로나 조직에 득이 될 행동이라고 생각이 들지도 않는다. 더군다나 보고서 쓰는 법을 그 당시 미리 수련했다는 생각에 그렇게 크게 불이익이었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꼰대가 되었나 보다.

 

 적당히 부당한 지시에 따르는 우리의 자세는 받아들임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모여서 신나게 씹고 그 경험이 우리의 결속력을 다지는 일에 쓰였다. 그리고 구차하지만 그리 나쁘지 않았음을 나 스스로 수긍할 만한 긍정적인 면을 열심히 찾는다. 그리고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로 마무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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