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스호스텔 식당 청소 업무
골프장 사우나에서 10개월 가까이 일하던 중, 아빠는 직장 건강검진에서 결핵 진단을 받았다. 일하는 동안 피곤하긴 했지만, 별다른 증상이 없었기에 그 결과는 너무나도 뜻밖이었다고 했다. 그 때를 회상하며 아빠는 조용히 말했다.
"나는 다시 실업자가 되었어."
아무리 힘든 기억도 담담하게 이야기하던 아빠였는데, "실업자"라는 말을 발음하는 목소리는 이상하게도 기운이 빠진 듯 들렸다.
아빠는 치료를 시작하면서 소홀했던 건강 관리에 다시 마음을 썼다. 무엇보다 부지런히 걸었다. 먼저 정착한 엄마를 따라 처음으로 경주에서 살게 되었을 무렵, 낯선 고장에 마음을 붙일 수 있게 해 주었던 소금강산에서 금학산으로 이어지는 산길. 그 길을 아빠는 다시 걸었다. 출퇴근길이면 늘 인공적으로 잘 가꾸어진 골프장 잔디만 바라보다가, 소나무가 빼곡한 숲에서 울퉁불퉁한 길을 천천히 걸으며 들이쉬는 공기는 참 달게 느껴졌다.
모처럼 잘 쉬어서였을까. 아니면 숲에서 보낸 시간이 정말 효험이 있었던 것일까. 3주쯤 지나자 그 어느 때보다도 몸이 가뿐하게 느껴졌다. 그 즈음이면 약물 치료를 통해 결핵의 감염력도 사라진다던 의사의 말에 아빠는 몸이 근질거렸다. 엄마 몰래 놀이터에 나갈 궁리를 하는 아이처럼, 슬그머니 다시 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슬슬 교차로를 뒤적거렸다. 그전처럼 새벽 5시까지 출근해야하는 일은 아니더라도, 아빠는 여전히 집중할 수 있는 일이 필요했다. 그리고 일을 쉰 지 한 달만에, 더 쉬라는 엄마의 만류도 뿌리치고 기어이 출근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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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처럼 뽀얀 이팝꽃이 탐스러웠던 5월, 아빠의 새로운 직장은 유스호스텔이었다.
'유스호스텔'이라는 말을 듣자,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장면 몇 개가 떠올랐다. 중학교 시절 수학여행을 떠났던 경주에서의 기억이었다. 선생님을 따라서 유명한 유적지들을 둘러보고 오후에 도착한 숙소는 3층 꼭대기에 까만 기와를 가지런히 얹은 한옥 분위기의 유스호스텔이었다. 그곳엔 내 눈에 커다랗게만 보이는 방들이 복도를 따라 길게 늘어서 있었다. 온종일 보았던 불국사며 첨성대 따위엔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나는, 밤늦도록 친구들과 연예인 이야기며 짝사랑 이야기를 하느라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다. 누군가가 깨우는 소리에 간신히 일어나 아침을 먹으러 내려간 식당은 얼마나 컸는지. 무슨 음식을 먹었는지, 맛이 어땠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밤새 떠들고도 지칠 줄 몰랐던 친구들의 목소리로 커다란 식당이 온통 소란스러웠던 것만이 어렴풋하다.
그곳이 잠시 몸 담았던 일터였다고 말하는 아빠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조각조각 흩어져 흐릿했던 오래된 기억들이 아빠의 목소리를 따라 하나둘 천천히 윤곽을 드러냈다. 그 속에는, 나를 지켜보는 아빠가 숨은 그림처럼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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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7시, 유스호스텔로 출근한 아빠는 식당으로 향했다. 단체로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 식사를 편하게 할 수 있도록 식당을 청소하는 일이 아빠의 주 업무였다. 식사를 마친 학생이 일어난 빈 테이블은 얼른 헹주로 깨끗이 닦고, 식사 중 바닥에 떨어진 음식물도 그때 그때 치워야 했다. 아빠가 일하던 유스호스텔 식당은 한번에 오십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차례를 기다리는 학생들이 원활하게 식사를 할 수 있도록 신속하게 테이블을 정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학생들이 전부 식사를 마치고 여행지로 떠나고 나면, 아빠는 다시 한번 모든 테이블을 닦고, 바닥을 쓸고, 물걸레질로 마무리했다.
식당에서의 아침 일과가 끝나면, 아빠는 청소를 도왔다. 아빠가 일하던 유스호스텔은 3층 건물이었다. 1층에는 식당과 매점, 강당 겸 회의실이 있었고, 2,3층에 각각 10개가 넘는 객실이 있었다. 학생들 15명 정도는 넉넉히 지낼 수 있는 크기의 방이었다.
학생들이 빠져나간 방은 어지러웠다. 아무렇게나 펼쳐진 침구와 밤새 먹고 난 음료 캔, 과자 봉지, 컵라면 같은 것들이 나뒹굴었다. 청소를 담당하는 아주머니들은 방마다 쓰레기를 치우고, 침구를 정리하고, 바닥을 닦았다. 새로운 단체손님이 오는 날이면 아주머니들을 도와 방마다 새로운 침구를 채워 넣었다. 인원수에 맞춰어 여러 채의 이불을 방마다 나르다 보면, 분명 처음과 똑같은 솜이불인데도 신기하게 점점 무거워졌다. 아빠는 쓰레기로 가득 찬 종량제 봉투를 쓰레기 집하장으로 옮기고, 비질을 마친 복도와 계단을 물걸레질했다. 며칠째 아무도 드나든 적 없었던 강당에 색색의 꽃가루나 색도화지, 볼펜 같은 것들로 어수선해진 날도 있었다. 수학 여행 마지막 날 밤, 학생들이 장기자랑과 레크레이션으로 시간을 보냈던 흔적을 치우는 것도 아빠의 몫이었다.
청소를 하다 보면 어느새 점심 시간이었다. 학생들은 대개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여행을 나갔다가 점심은 밖에서 먹고, 늦은 오후면 돌아와 식당에서 저녁을 해결하곤 했다. 하지만 숙소 인근의 유적지에 다녀오는 일정이 있을 때면 점심을 먹으러 다시 숙소에 들르기도 했다. 그런 날이면 아빠는 하루 세 번, 테이블 정리와 식당 청소를 반복해야 했다.
학생들이 식사를 모두 마치고 나면, 드디어 직원들의 식사 시간이었다. 직원은 사장을 비롯해 유일한 남성이었던 실장, 주방 보조 아주머니 두 명, 청소를 담당하는 아주머니 세 명, 그리고 아빠까지 모두 여덟 명이다.
사장은 훤칠한 키에 등과 어깨가 튼튼한 여성이었는데, 웬만한 남성 못지않게 배포가 두둑하고 시원시원했다. 그녀는 식당의 주방장이기도 했다. 주방일을 돕는 아주머니 두 명이 있기는 했지만, 단체손님들을 위한 조리는 대부분 그녀 혼자 도맡다시피 했다. 보조 아주머니들이 설거지와 주방 정리를 하느라 쉴 새 없이 손을 놀리는 동안, 사장은 퍼런 불기둥이 치솟는 화구 앞에서 분주했다. 뽀얀 김을 토해내는 커다란 솥과 냄비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다 보면, 어느새 구수하고 매콤한 냄새가 주방 밖까지 흘러넘쳤다. 많은 양의 음식들이 커다란 스테인레스 볼에 담겨 배식대에 차례로 진열되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녀에게 100명분의 음식을 만드는 일쯤은 무척이나 쉬운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녀는 솜씨가 좋았다. 하얀 플라스틱 그릇에 무심하게 담아낸 소박한 반찬들은 한참 바쁘게 움직여 시장했던 아빠 입에 착착 감겼다. 유스호스텔에서 일하는 날이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세 끼를 사장이 만든 밥으로 해결했다. 그곳에서 일하던 짧은 기간 동안 가장 좋았던 점이 바로 세 끼 식사를 챙겨 먹을 수 있었던 점이었다고 아빠는 말했다.
오전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꼬박 12시간을 유스호스텔에서 보내고 돌아오는 퇴근길이 아빠는 전혀 힘들지 않았다고 했다. 복도를 떠들썩하게 울리던 아이들의 기척을 뒤로하고 그곳을 나설 때면, 다음 날 아침 또 다시 북적거리는 식당으로 출근할 생각에 아빠는 마음이 놓였다.
수학여행 마지막 일정을 마치고 아이들이 떠난 날이면, 유스호스텔은 유난히 썰렁했다. 퇴근길, 아빠 발걸음도 괜히 허전했다. 학생들 일정에 따라 이틀이나 사흘만 출근하면, 그 주엔 손님도 없는 유스호스텔로 출근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늘 강단있어 보이던 사장은, 수학여행이 한창이던 5월이면 일주일 내내 학생 손님들을 챙기느라 눈코 뜰 새 없었던 때가 이제는 꿈만 같다고 했다. 그리고는 포옥, 긴 한숨을 내쉬었다. 세월호 참사 때문이었다. 지금도 믿기 힘든 그날 이후, 불국사와 보문단지 주변 유스호스텔들뿐만 아니라 경주 전체가 조용해졌다. 오랜 세월 영업을 해 오던 숙박시설들이 하나 둘 문을 닫는 일도 눈에 띄었다.
아빠가 그곳에서 일하던 때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꼭 2년이 지난 2016년 봄이었다. 그런 시절에 경주까지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이라 더 반가웠던 걸까. 아빠는 테이블을 치우는 틈틈이 학생들이 밥 먹는 모습을 훔쳐보는 것마저 즐거웠다고 했다. 특히 식판 가득 음식을 담아 숟가락으로 밥이며 국을 푹푹 떠 먹는 아이들을 볼 때면, 테이블에 양념을 흘리거나 나물 반찬을 식당 바닥에 떨어뜨려도 괜찮았다며 아빠는 웃었다.
"아침부터 볼이 불룩하도록 잘먹는 아이들을 보면, 이 녀석들 멀리 경주에 와서도 잘 지내고 있구나 싶어 안심이 됐어."
그때였다. 씩씩한 허밍을 닮은 맹렬한 소음이 귓가에 밀려왔다. 어느새 나는 높은 천장 아래, 테이블이 다닥 다닥 붙어있는 식당 안에 들어서 있었다. 음식을 담은 식판 위로 친구들의 크고 작은 목소리와 달착지근하고 짭쪼름한 음식 냄새가 뒤엉켰다.
밥을 먹는 건지, 친구들의 수다를 먹는 건지 모를 정신 없는 아침 식사였지만, 낯선 곳에서 친구들과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입을 벌려 큰 소리로 웃다가, 뭐든 잘 흘리던 나는 또 음식을 흘렸다. 테이블은 된장 국물로 지저분해졌고, 젓가락으로 집었던 달걀말이 한 조각마저 바닥에 떨어뜨렸다. 나는 깨끗하게 치워진 옆자리로 얼른 자리를 옮겼다. 더러워진 테이블 따위 나와는 상관 없었다.
내가 다시 큼직한 달걀말이를 입에 넣어 오물거릴 즈음, 고무장갑을 낀 손이 나타나 조용히 테이블을 훔쳤다. 내 발 옆에 쪼그려 앉아 떨어진 달걀말이를 치우던 직원의 옆모습을 나는 스쳐 지나갔다. 밥을 다 먹고 친구들과 팔짱을 낀 채 식당을 빠져나올 때에도, 그는 여전히 시끄러운 테이블 사이를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아빠였을까.
그날의 여정을 마치고 늦은 오후 숙소로 돌아왔을 때, 쓰레기 봉투를 들고 있던 뒷모습이.
이제는 알아볼 수 있다. 그가 아빠였다는 것을.
서른 해 전 수학여행을 갔던 그곳에, 십 년 전의 아빠가 숨은 그림처럼 조용히 다녀갔음을. 어떤 마음은 시간을 거슬러 몇 번이고 같은 자리에 다녀올 수도 있다는 것을. 때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을 만나러 다녀오기도 한다는 것을.
이제야 숨은 그림 찾기를 완성한 것처럼, 오래 전 나의 추억 속에 들어 있는 아빠를 본다. 그 그림 속에는 여든이 다 된 아빠를 바라보는 중년의 내 모습도 함께 숨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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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5월부터 한달 반 가량을 일하고 나니, 수학여행 시즌이 끝나면서 유스호스텔을 찾는 손님도 뚝 끊기고 말았다. 아빠는 다시 실업자가 되었다. 그리고 넉 달 후, 아빠는 퇴직 후 가장 오랫동안 지속하게 될 마지막 일자리를 만나게 되었다. 유스호스텔에서 돌아오는 마지막 퇴근길에는 알지 못했던 아빠의 미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