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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디오 May 16. 2024

부동산 사장님

내가 그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아파트 분양권을 사기 위해서였다.

살던 동네 근처에 신도시가 개발되며 아파트 분양 소식이 들리자,

내가 살던 지역의 모든 시민들은 그 신도시 아파트에 너도 나도 청약을 넣었다.

물론 나도 넣었고 남편도 넣었지만, 둘 다 그 많은 아파트 청약에 모두 떨어졌다.

나와 남편은 새 아파트 자가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아파트 분양권을 사기 위해 부동산에 연락을 했다.


그동안 우리 가족은 전셋집을 전전하며 부동산 사장님들을 두루 접해 보았다.

하지만 전셋집 구할 때와 자가를 구할 때의 마음가짐은 무척이나 다른 것이었다.

자가 매매라는 인생 최대의 쇼핑을 앞두고 정신을 집중해 보았지만,

그녀 앞에서 우리(나와 남편) 같은 부동산 풋내기들은 그냥 꿀떡 같은 존재였다.

어찌나 반지르르 말을 잘하는지, 어느새 우리는 분양권 매매 계약서를 작성하고 있었다.


여하튼 그렇게 해서 인연을 맺게 된 부동산 사장님이었고,

나중에 해당 신도시 치과 자리를 구할 때도 자연스럽게 연락을 하게 되었다.

나는 한자리에서 오래 치과 운영을 했으면 하는 마음에 상가 임차를 하지 않고 분양을 받으면 어떨까 생각을 했다. (모지리의 생각.)

한창 새 건물들이 올라가고 있을 시기였고 분양하는 건물들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치과 할 건데, 분양받을만한 상가가 있는지 먼저 문의를 했는데

'그녀답게' 바로 물건을 잡아 연락이 왔다.


"여기~ 코너에 분양하는 건물이 마침 있어요. 분양가도 잘 나왔어~ 벌써 2층에는 이비인후과 원장님이 개원하려고 분양을 받아갔대요~ 코너라서 3층이나 4층도 잘 보여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놀랍게도 저 문장에서 fact는 하나도 없었다.


내가 먹은 오렌지 주스가 가짜였다니...


"나중에 여기 앞에 부지에 공공기관 들어온다고 하더라고~ 그러면 사람들이 여기로 많이 다닐 거야~"


물론 이 문장도.. 결론적으로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러나 대출받은 돈을 움켜쥔 부동산 왕초보였던 나는 호구 중의 대호구!

부동산 사장님의 화법을 저때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사실인 듯 사실 아닌 사실 같은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마구 내뱉었다.

그러나 하나하나 찬찬히 뜯어보면,


1. 코너에 분양하는 건물

: 코너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바로 옆에 공터가 있었고, 거기 건물이 드러 서면 그 건물에 가려져 안 보일 자리였다. 실제로 곧이어 건물이 들어섰고 해당 건물은 이제 잘 보이지 않는다.

2. 2층에는 이비인후과 원장님이 분양을 받아갔대요~

: 그 이비인후과 원장님이 분양을 알아봤을 수는 있겠지. 그런데 분양 안 받았다. 거기 건물 다 짓고 나서도 2층은 이비인후과는 커넝 한참 동안 공실이었다. 어쩌면 그런 이비인후과 원장님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3. 건물 앞 부지에 공공기관이 들어온다고

: 공공기관이 들어올 수 있는 용도의 땅 부지인 것은 맞다. 하지만 어떤 기관이 언제 들어올지 아무것도 예정된 것이 없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땅은 그냥 빈터이다.


그녀는 내 입장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들을 제대로 짚어주지 않고 그저 계약만 하게 하려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하자면, 이 바닥에서 그런 팩트 체크는 스스로 하는 것이 맞다.

부동산 사장님의 목적과 내 목적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한다.

나한테 수수료를 받는다고 해서 내 입장을 생각해 주는 사람이 결코 아니다.

부동산 사장님마다 성향이 다르겠지만, 누구를 만나더라도 내 돈 쓸 때는 내가 꼭 알아보는 거다.


부동산 사장님이 소개해준 자리가 '똥자리'라는 것은 같이 일하던 치과의 대표원장님이 짚어주었다.

그 이후 분양 말고 임차할만한 자리도 몇 개를 소개받았는데 모두 '똥자리'였다.

그러면서 '치과의사가 실력이 좋으면 다들 알아서 찾아간다'는 말을 늘 하곤 했다.


결국에는 지금 개원한 자리를 내가 정하게 되면서 부동산 사장님을 중간에 끼고 건물주와 연락을 했다.

뭐 아무리 돌이켜봐도 부동산 사장님의 활약은 없었다.

상가 계약 5년 할까 생각했는데 중간에서

"상가 계약은 다 2년이에요~ 5년은 없어~" 뭐 이딴 말이나 해대고,

막판에 내가 고민을 하자 한의원이랑 가정의학과 원장님도 같이 컨택 중이라고 나를 조바심 나게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한의원과 가정의학과 원장님의 실존 여부는 알 수 없다.

계약서에 중개 수수료를 최대 액수로 적어놨길래 전화해서 백만원정도 깎자고 하니까 그때는 잠깐 정신을 놓고 있었는지 수수료를 깎아줬다. (저는 그렇게 못 했는데 중개수수료는 계약서 도장 찍기 전에 깎으세요.)

이후에 건물주 사장님과 인테리어 과정에서 트러블이 있을 때 연락해서 중재해 주길 바랐는데, 역할을 잘 못했다. 결국은 내가 건물주 사장님과 직접 대화해서 해결된 것이 많다.

지금은 이 부동산 사장님과는 인연을 끝냈다.




참고로 상가 계약은 2년 또는 5년 단위로 하게 되는데 치과일 경우는 5년 추천이다.


<2년을 할 경우>

장점: 치과가 잘 안 될 경우 빨리 정리하고 나갈 수 있다.

단점: 건물주가 2년마다 월세를 올린다.


<5년을 할 경우>

장점: 건물주가 5년 뒤에나 월세를 올릴 수 있다.

단점: 치과가 잘 안 될 경우 5년 동안 묶여 있어야 한다.


어딘가에 5년 동안 묶여 있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지만, 치과 특성상 만약 잘 안된다고 하더라도 2년 만에 다른 곳으로 옮겨야 하는 것은 더 큰 부담이다.

그래서 5년을 추천한다.


그리고 처음 개원 자리를 정할 때 상가 분양을 받는 것이 왜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닐까?

자, 본인이 건물주라고 한번 생각을 해보자.

내 건물이 자리가 너무 좋아. 막 너무 잘 보이는 자리야. 그래서 이 정도면 공실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아.

그러면 당신은 그 건물을 팔겠어요? 아니면 임차를 줘서 월세 받으며 대대손손 물려주겠어요?

다른 경우, 내 건물이 자리가 좀 그래. 마침 신도시 개발하는 동네에 땅이 있어서 덩달아 건물을 지었는데, 임차가 잘 나갈까 걱정이야. 그러면 당신의 선택은?

정리하자면, 자리가 좋은 건물이 분양을 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는 말이다.


그래도 어찌어찌 중간 정도 되는 자리에 상가를 분양받았다고 해보자.

그 자리에서 10년 20년 치과를 안정적으로 한다면 별 문제는 없다. (보통 이 생각으로 분양을 받고 싶겠죠?)그런데 막상 치과가 잘 안~되어 당신은 최종적으로 이전을 결정했다.

당신은 분명히 1층보다는 2층이나 3층을 분양을 받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치과는 1층에 잘 안 들어가니까.)

2층이나 3층은 1층보다 팔거나 임차를 내주기가 무척 어렵다.

게다가 치과가 망한 자리에 누가 들어올 수 있을까? 웬만한 업종은 어렵다고 보면 된다.

그렇다고 치과 망한 자리에 또 치과 들어올까? 답을 굳이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니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보통은 임차를 해서 치과를 시작하는 것이 Exit 전략을 짜기가 수월하다.

나중에 정~ 내 상가를 사서 진료를 하고 싶다면,

현재 있는 자리가 시간이 지난 후에 매물로 나왔을 때 그때 사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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