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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주신쥬디 Mar 25. 2024

첫 위스키, 첫 취중연주

Fireball & Frozen

2015/6/10

이 날의 일기는 없고 남아있는 건 사진뿐이다.

일기를 쓸 정신이 아닌 날이었지만 평생 잊지 못할 에피소드가 만들어진 날이다.

Haines에 내렸다. Haines는 동화 속 마을처럼 작고 예쁜 동네다. 

Haines에 정박해있는 내 직장

크루즈에서 내려 유료 투어를 하는 게 아니면 산책, 등산 외에는 특별한 액티비티가 없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그리고 와이파이가 무료인 작은 카페가 하나 있어서 크루들은 그 카페에 죽치고 앉아서 배에서 못했던 인터넷을 맘껏 하곤 했다.


이 날은 내가 소속된 Entertainment 팀이 야심 차게 피크닉을 준비했다.

역시, 배에서 원 없이 먹고 마시지만 땅에서 먹고 마시면 더 즐거운 그들.

Entertainment 팀엔 싱어, 댄서들이 10명 이상 있는데 뮤지션들과는 다르게 대문자 E들만 모아 놓은듯한, 일명 관종 집단이다. 남자들은 대부분 게이여서 시끄러운 여자들 10명 이상 있는 느낌이랄까? 나랑은 결이 좀 다른 부류였지만 같은 팀이고 또래이다 보니 친하게 잘 지냈다.

이 사진 속에 남자는 없다. You know what I mean?

피크닉을 한다길래 쫄래쫄래 쫓아갔더니 스낵이 잔뜩 차려져 있었다. 언제 어디서 그 많은 걸 구해왔는지 참 부지런하기도 하여라. ㅋㅋㅋㅋ

나는 대학 시절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다. 가끔 맥주랑 와인을 마시긴 했지만 술 때문에 필름이 끊기거나 민폐를 부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크루즈에서 일할 땐 비교적 자주 마셨어도 늘 정도껏 마셨다.

하지만 이 날, 나는 새 역사를 썼다.


피크닉 테이블엔 위스키가 많았다. 크루들이 배에서 맥주랑 와인은 마실 수 있어도 hard liquor는 마실 수 없기 때문에 이렇게 밖에서 술을 마실 때면 보드카, 위스키 같은걸 햄스터가 해바라기씨 볼때기에 저장하듯이 그들의 위장에 들이붓는다.

나는 위스키를 처음으로 한입 해보고는 으.. 이걸 왜 마시나 싶었다.

그랬더니 친구들이 Fireball 위스키는 시나몬맛이라며 권해주었다.


"오? 맛있네??"


시나몬으로 위장한 위스키를 홀짝홀짝 마시기 시작했다.

바보게임도 하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피크닉을 즐기다 보니 금세 배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고, 나는 내 인생 최대의 알코올 섭취로 헤롱헤롱 대고 있었다. 룸메인 애슐리와 함께 무사히 방으로 들어왔지만 내 정신은 들어오지 않았다.

잠깐만 누워있다가 공연하러 가야지.................

.

.

.

.

띠로로로리링


전화기 울리는 소리에 잠에서 깨자마자 쎄한 느낌에 시계를 봤다.


6:30 pm

Ashley!!!!!!!!!!!!!! It's six thirty!!!!!


밴드 리더 James가 건 전화였다.

6시 30분 공연 일정인데 애슐리와 나 둘 다 술에 취해 잠들어버린 것.

일단 전화를 받아 빨리 가겠다고 대충 둘러대고 허둥지둥 공연복으로 갈아입고 뛰쳐나갔다.

다행히 10분 이내로 도착했고 애슐리와 나는 I'm sorry를 수십 번 외치며 공연을 시작했다.

헤롱헤롱했지만 밴드곡 연주하는 데엔 문제는 없었다. 평소엔 크게 집중하지 않아도 쉽게 하는 연주인데 이 순간만큼은 온 집중력을 끌어모아 손가락을 움직이다 보니 평소보다 연주를 더 잘한 것 같기도 하다.

애슐리도 술 마신 티도 안 내고 끝까지 노래를 잘했다.

이 공연의 테마는 Fire & Ice 여서 말 그대로 불과 얼음에 관련된 곡들을 했는데 (하필 난 또 Fireball을 마셨네?) 겨울왕국의 Let it Go가 그중 하나였다.

그 곡은 공연의 하이라이트처럼 메인 싱어인 Laura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등장해서 내 피아노 반주에 맞춰서 노래를 부르는, 보컬 피아노 듀엣 곡이었다.


아, 내가 술 때문에 Laura한테 민폐 끼치면 안 되는데, 정신 바짝 차려야지!

내가 대충 만들어놓은 Let it Go 악보를 꺼내서 연주를 시작했다.

술을 안 마셨어도 긴장했을 듀오 곡인데 거의 만취 상태로 해야 한다니, 하 어쩌다 내가 이렇게 된 건가.

파도가 심했는지 하필 배도 유난히 흔들리고, 내 머리는 핑핑 돌고, 서서 키보드를 쳐야 하고, 역대급 난리통이었지만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모든 사람들이 다 아는 Let it Go 전주를 시작했다.

"에라 모르겠다 그냥 하는 거야!!!"

원래 연주를 시작하면 그때부턴 뭘 생각할 겨를이 없다.


Let it go~ Let it go~

~

~

Let the storm rage on!!!!!!! 당당당당 당당당!

"The cold never bothered me anyway"]

~박수~~~~~~


휴.. 실수 없이 무사히 끝냈다!


제정신이 아닌 채로 한 시간 공연을 무사히 끝냈고 밴드리더 James가 애슐리와 나를 불렀다.

ㅎㄷㄷㄷ 나 혼나는 건가 ㅠㅠ 취한 거 들킨 건가.. 혼날만하지..

그렇지만 맨 정신인 죨쥐아저씨보다 술 취한 내가 연주 더 잘하는걸? 흥


James는 다음부터 늦지 말라며 조곤조곤 몇 마디 하고는 해산했다.

술에 대한 얘기는 없었다. 오? 술마신건 모르나? 그냥 늦어서 한마디 한 건가?

드러머랑 베이시스트 Will, Diego에게 나 쑤퍼 드렁크였는데 티 났지?! 물었더니 전혀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그래서 늦었던 거냐며 술에 취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고 했다.


내 정신줄 칭찬해..!

하지만 다시는 이런 리스크 테이킹은 하지 않을 테야!!


공연 후에 나는 저녁식사고 뭐고 생각 없었고, 후다닥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널브러졌다.

그리고 난생처음으로 밤새 숙취에 시달렸다.

Fireball 위스키는 이 날 이후로 한 번도 마신 적이 없다.

기왕 또 마신다면 알래스카 Haines에 가서 내 첫 취중연주를 추억하며 마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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