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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릭 Nov 16. 2022

기억의 환기

십 수년 전, 경복궁역 인근에 위치한 회사에 다닐 때였다.


출근길에 경복궁역 출구를 빠져나와 회사로 가자면 두 가지 루트가 있었다.

첫 번째는 너른 대로변으로 지방경찰청 울타리를 둘러서 가로수길을 즐기며 가는 힐링 루트였고, 두 번째는 구불구불 좁은 골목을 질러가는 지름길 루트였다. 나는 그중 지름길 루트를 선호했더랬다.

단순히 빨리 갈 수 있어서 라기엔 또 다른 이유가 가진 여운이 컸다.

지름길엔 카페, 술집, 밥집이 촘촘히 자리해 있어 밥때나 술 때가 되면 회사원, 공무원들의 구둣발 소리와 대화 소리가 골목 안을 시끄럽게 채웠다. 하지만 한옥을 유지한 채 영업을 하는 가게가 많아 좁은 골목과 갖은 소음에도 불구하고 은근한 여유가 흘렀다. 그건 힐링길을 걷는 거만큼이나 기분의 전환에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내가 그 길을 선호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다른 것이었다.

누구도 짐작하지 못할 이유였다.


밥 냄새.


출근길 골목 안은 장사 준비로 분주한 음식점의 업무 소음과 은근한 음식 냄새가 가득했다.

매일 김장을 한다 해도 어색하지 않을 양의 김치를 담그느라 배추를 씻고, 김치 속재료를 다듬어 양념을 버무리며 나누는 주방 아주머니들의 뒷담화는 소란스럽지만 정겨웠다. 하지만 공복 출근길에 나를 제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은  생선조림 냄새였다.


외할머니는 경북 김천에서 하숙집을 운영하셨다.

작은 방들이 집터를 빙 둘러 위치했고 거기엔 학생, 직장인, 신혼부부 등 다양한 사람들이 기거하였다.

이른 아침이면 할머니는 안방 곁에 딸린 부엌에서 하숙생들을 먹이기 위한 끼니를 마련하셨다.

정갈하게 차려진 작은 소반은 식사를 위해 안방에 모인 하숙생들 앞에 차려졌고 그들은 조용히 그러나 맛나게 상 위의 음식을 즐겼다.

어떤 음식들이 차려졌었는지 구체적으로 모두 기억나진 않는다.

하지만 이 나이가 되어도 또렷하게 기억나는 한 가지 반찬이 있다.

무를 넣어 맛나게 조려낸 생선조림이다.

냄새만으로도 맛이 기가 막혀서 없던 허기마저 생산해내던 그 냄새.

생선조림은 냄새 만으로도 충분한 만족감을 줬다.

하숙생들의 식사를 지켜보며 뒹굴거리던 그 시절의 나는 꽤 충만한 기분의 아침을 맞이했더랬다.


엄마, 밥집에서 음식 냄새가 나는데 꼭 외할머니가 해주던 밥 냄새 같아.


언젠가의 출근길, 밥 냄새에 취해 옛 생각을 하다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는 그런 걸 기억하냐고 작게 웃었다.

전화기 너머의 엄마도 외할머니의 부엌을 떠올리는 거 같았다.


그 시절 그곳, 소란한 밥 냄새가 다소 지친 출근길에 추억 어린 공복을 선사해줘서 나의 아침 업무의 시작은 좋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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