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_ PM 20:25 일요일. 기록 4시간 전(2/3)
“으악! 누구세요!”
적반하장도 유분수였다. 중년 남자는 현관 앞에서 놀란 눈으로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누구시냐고요?”
“저… 이 집 사는 사람인데요? 전세….”
그 남자를 자세히 보자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이었다. 그는 바로 부동산 중개업자였다. 그의 뒤로 젊은 커플이 서 있었다. 자초지종을 들어 보니 집주인이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 급매로 집을 내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얘기를 들었다고 하더라도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들었다.
“아니, 그럼 연락을 하고 오셔야죠!”
“내가 전화를 몇 번이나 했는데… 혹시 차단했어요?”
“… 요즘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요. 모르는 번호는 바로 차단하죠.”
“참 나… 그래, 그렇다 치더라도 그러면 왜 집주인 전화도 안 받아요? 그 사람 얘기 들어 보니깐 자기 전화도 잘 안 받는다고 하던데? 아마 집에도 몇 번 찾아온 모양인데 집에 잘 없는 것 같다고 해서….”
“…”
집주인의 전화를 받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아직 1년이 채 안 돼 계약 기간은 남아 있었지만 전셋값 대란과 폭등 시대에 운이 좋게도 시세보다 터무니없이 싼 가격에 입주를 했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자가가 없다는 이유로 아내에게 눈치를 많이 봤다. 물론 시대가 지나서 남자가 꼭 집을 해 와야 하는 법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한민국 정서상 남자로서 꽤나 자존심이 상했던 부분이었다. 어쨌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과 관련된 연락은 피해 왔는데 그게 화근이 됐던 모양이다. 바빴다는 핑계로 상황을 무마하고 이왕 이렇게 된 김에 새로운 집주인이 될 수도 있는 사람들에게 집을 보여 주게 됐다. 그들은 30대 초반의 예비 신혼부부로 보였다. 서로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에서는 꿀이 뚝뚝 떨어졌다.
“여기 확실히 투자 가치가 있겠지?”
“교육, 교통, 문화 이렇게 세 가지가 괜찮으면 되지 뭐.”
“그런데… 집이 좀 어둡다?”
그러자 중개업자가 손사래를 치며 오버스럽게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의 모습은 왠지 모르게 다급하고 절실해 보였다.
“요즘 이 가격에 이런 곳은 없어요. 집주인이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 그리고 조명은 사는 사람들이 인테리어를 그렇게 해서 그래요.”
“아니요! 그래서 좋다고요!”
나는 낄낄대는 둘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저으며 혀를 찼다. 다행히 아내가 화장실에 가서 그렇지 만약 지금 저 신혼부부를 보고 있었더라면 끔찍하다. 나보다도 어린 남자가 벌써 집 장만을 한다며 눈치를 줄 리가 뻔했다. 그녀는 습관적으로 환경이 불안하면 아이가 잘 들어서지 않는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왔기 때문이다. 자가가 아니라 전셋집에 살아서 불안하기에 자신이 임신이 안 된다는 식의 말을 들을 때마다 빈정댔던 나였다. 그러면 그럴 때마다 그녀는 내가 자격지심을 갖고 있다며 상처를 주는 말을 해서 다툰 적이 몇 번 있었다. 다행히도 아내는 한참 동안을 화장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 틈을 타서 나는 얼른 중개업자를 불러 조용히 물었다.
“그런데… 집주인이 왜 급매로 집을 내놓는데요?”
“… 됐어요…. 계약 기간 남아 있는데, 이 얘기 들으면 괜히 찝찝해요.”
인간은 호기심의 동물인 것 같다. 그냥 이유 없이 물어봤다가 궁금하게 만드니 없던 호기심이 생겨났다. 나는 호기심 때문에 희망에 찬 거짓말을 뱉었다.
“… 사실 저희 이혼할 수도 있어요. 곧 집 뺄 수도 있어서 괜찮아요.”
“… 정말요? 신기하네…. 집주인 말이 맞나 보네요.”
“... 네?”
“사실… 아저씨네 들어오기 전부터 여기 살던 집주인이 집을 급매로 내놨다가 안 팔려서 고민이 많았어요. 그때 당시 아내랑 별거 중이었는데 용한 무당이 그랬대요. 이 집터가 안 좋다고.”
“… 집터가 안 좋다고요? 아파트에도 그런 게 있어요?”
“그래서 이사 빨리 가려고 전셋값도 그렇게 후려친 거였어요. 그런데… 이번에 결국 이혼을 했대요. 그런데… 그 아내가 글쎄 자살을 했다지 뭐예요? 그때 이후로 무당한테 굿도 하고 아내 관련한 모든 걸 정리한다고 지금 난리도 아니에요, 그 사람.”
이때 갑자기 누군가의 외마디 비명이 집을 울렸다. 그것은 바로, 아내의 목소리였다.
“왜 그래? 또 미끄러졌어?”
화장실로 달려간 나는 문을 반쯤 열었다. 아내는 두 팔로 머리를 감싸 쥐고 욕조 구석에 쪼그려 앉아 벌벌 떨고 있었다.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화장실로 들어간 나는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충격적인 장면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욕조 안에는 임신 테스트기들이 널브러져 있었고, 아내는 옷을 입은 채로 소변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색이 된 듯한 얼굴의 그녀는 나의 눈을 바라보자 입꼬리를 올렸다.
“… 뭐 하는 거야?”
“장난이야!”
낄낄대는 아내의 눈빛은 평소와는 달랐다. 저번 겨울에는 이런 적이 있었다. 내가 전날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에 다음 날 저녁까지 코를 골며 잠을 잤을 때였다. 몇 번을 깨워도 안(못) 일어나자 그녀는 손가락으로 내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는 귤껍질을 반으로 접어 즙을 튀겨서 깨웠다. 그 정도로 심한 장난을 좋아하는 아내였다. 하지만 그때는 그녀의 눈빛에서 ‘내가 너무 심했나?’라는 죄책감이 살짝이라도 묻어 나온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지금은 달랐다. 왠지 모르게 당당하면서도 동시에 나를 마치 벌레 바라보듯이 경멸하는 눈빛이었다.
‘똑, 똑.’
이때 화장실 노크 소리와 함께 부동산 중개업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라고 했는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저희 먼저 가 볼게요….’와 같은 말이었던 것 같다.
“… 너 이따 보자.”
화장실 문을 열고 나가자 사람들은 이미 집을 나가고 난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