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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운전하는고양이 Dec 18. 2024

벽은 바다가 되었어

열두 번째.

ShonEjai님의 사진: https://www.pexels.com/ko-kr/photo/1227515/


웃으면서 말하고 있지만 사실 진짜 슬픈 얘기야


저기쯤인가 여기 어디쯤이었을까

철옹성처럼 단단해 보이는 벽 하나가 있었어


실처럼 가느다란 풀잠자리가 들락일 정도

야트막한 문틈도 놓치지 않고

기어코 비집고 들이치는 빗줄기에도,

집 앞 상가에 미용실 철간판을

종잇장처럼 공중으로 띄워 구겨버리는

성남 짐승의 거친 포효를 닮은 바람에도

절대 미동도 않을 것 같은 벽 말이야


벽은 언제나 그 자리에 무너지지 않고 우직하게 서 있었어


벽에는 귀가 없어 벽에는 코가 없지 벽에는 눈도 없어

그리고 벽에는 입도 없었어

벽에 손이 있었을까 벽에게 발은 있었을까


벽을 넘어 다니는 사람들은 생각했어

벽은 이 자리에 영원히 있을 거야 어디 갈리 없지


뱀 같은 눈을 하고 굽이굽이 타고 훑어도

'응차' 시커먼 신음 뱉고 뒷발차기를 해대도

마치 악인이 써 내렸나 싶은 악필을 써 갈겨도


단단하고 무던한 벽은 어디 갈리 없지


어느 날

늘 그 자리에 있는 벽에 손가락을 대 봤어

이상하지 분명 단단해 보였는데 그게 아니야

푹신하다 못해 물컹이고 있었어

아마 조금만 더 힘을 줬더라면 

손가락이 벽의 반대편을 뚫고 나왔을지도 몰라


풀잠자리의 날개 정도는 되려나

겨우 그 정도의 얇은 막으로 물컹이는 많은 걸 버텨낸 거야

눈을 잠시 닫고 천천히 천천히 

물컹이는 벽의 진짜를 받아내며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쓸어내렸어


그 순간이야 

포탄이 지나간 자리처럼 구멍이 뚫릴까 봐

벽에서 급히 손가락을 뗀 순간


벽이 움직이기 시작했어

마치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처럼

벽이 어지럽게 웅얼거려


벽에는 귀가 없어 벽에는 코가 없지 벽에는 눈도 없어

그리고 벽에는 입도 없었어

벽에 손이 있었을까 벽에게 발은 있었을까


겨우내 얼었던 속에서 움츠렸던 씨앗이 움틀 때

나비와 벌의 날갯짓으로 마른 나뭇가지가 꽃송이로 뒤덮일 때

봄, 여름 싹 틔우고 거친 장마 버티고 기어코 가을의 들판이 넘실거릴 때


벽은 온몸으로 웅얼거렸어 춤을 추듯이

아무도 못 알아들어도 좋아 밤새도록 춤출 거야


물컹이던 벽이 녹아내려, 바닥엔 녹은 벽으로 흥건했어

바닥 위에 서있던 벽이 바닥을 흐르기 시작해

더 낮은 곳으로 더더 낮은 곳으로 흘러 흘러 하수구로

온갖 것들이 모두 섞여있는 그곳 

칠흑 같은 어둠, 코를 찌르는 악취, 번쩍이는 눈들의 움직임


어디로 가는지도 몰라 정처 없이 떠 다녀 

어둠에 몸을 맡겨 악취에 몸을 맡겨

그렇게 세상의 때를 하나둘 묻히며 떠돌았어

알 수 없는 곳이라 해도 무섭지 않았지 

흐르기 시작한 순간부터야

그 어떤 것도 다 받아낼 거라고 

벽은 말하고 있었어


멀리서 느껴지는 따뜻한 기운 

흐르는 벽은 멀리서 빛을 느꼈어 

점점 가까워지는 빛 

마침내 따뜻한 빛이 벽에 닿았을 때 

아!

환희에 찬 외마디 토해내고 낙하했어


그곳은 바다

나의 벽은 바다가 되었어

마침내 넓고 푸른 

언제나 춤추는 바다가 되었어






커버 이미지 출처:Victor Freitas님의 사진: https://www.pexels.com/ko-kr/photo/1072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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