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두 번째.
철옹성처럼 단단해 보이는 벽 하나가 있었어
벽에는 귀가 없어 벽에는 코가 없지 벽에는 눈도 없어
그리고 벽에는 입도 없었어
벽은 이 자리에 영원히 있을 거야 어디 갈리 없지
풀잠자리의 날개 정도는 되려나
겨우 그 정도의 얇은 막으로 물컹이는 많은 걸 버텨낸 거야
눈을 잠시 닫고 천천히 천천히
물컹이는 벽의 진짜를 받아내며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쓸어내렸어
그 순간이야
포탄이 지나간 자리처럼 구멍이 뚫릴까 봐
벽에서 급히 손가락을 뗀 순간
벽이 움직이기 시작했어
마치 눈에 눈물이 차오르는 것처럼
벽이 어지럽게 웅얼거려
벽에는 귀가 없어 벽에는 코가 없지 벽에는 눈도 없어
그리고 벽에는 입도 없었어
겨우내 얼었던 땅 속에서 움츠렸던 씨앗이 움틀 때
나비와 벌의 날갯짓으로 마른 나뭇가지가 꽃송이로 뒤덮일 때
봄, 여름 싹 틔우고 거친 장마 버티고 기어코 가을의 들판이 넘실거릴 때
벽은 온몸으로 웅얼거렸어 춤을 추듯이
아무도 못 알아들어도 좋아 밤새도록 춤출 거야
물컹이던 벽이 녹아내려, 바닥엔 녹은 벽으로 흥건했어
바닥 위에 서있던 벽이 바닥을 흐르기 시작해
더 낮은 곳으로 더더 낮은 곳으로 흘러 흘러 하수구로
온갖 것들이 모두 섞여있는 그곳
칠흑 같은 어둠, 코를 찌르는 악취, 번쩍이는 눈들의 움직임
어디로 가는지도 몰라 정처 없이 떠 다녀
어둠에 몸을 맡겨 악취에 몸을 맡겨
그렇게 세상의 때를 하나둘 묻히며 떠돌았어
알 수 없는 곳이라 해도 무섭지 않았지
흐르기 시작한 순간부터야
그 어떤 것도 다 받아낼 거라고
벽은 말하고 있었어
멀리서 느껴지는 따뜻한 기운
흐르는 벽은 멀리서 빛을 느꼈어
점점 가까워지는 빛
마침내 따뜻한 빛이 벽에 닿았을 때
아!
환희에 찬 외마디 토해내고 낙하했어
그곳은 바다
나의 벽은 바다가 되었어
마침내 넓고 푸른
언제나 춤추는 바다가 되었어
커버 이미지 출처:Victor Freitas님의 사진: https://www.pexels.com/ko-kr/photo/10728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