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기만 하면 현실이 되는 양피지
질문을 활용한 글쓰기-(4)
파도 소리가 귀를 때리고, 바닷바람이 얼굴을 할퀴었다. 은성은 해안가에 쓰러져 정신을 차렸다. 그의 배는 폭풍우에 휩쓸려 난파되었고, 홀로 이 외딴섬에 표류했다. 주변을 둘러보니 황량하고 사람이 살지 않는 섬처럼 보였다. 구조의 희망은 희미해 보였다.
며칠 동안 은성은 물과 식량을 찾아 섬을 돌아다녔다. 비록 열대과일과 빗물을 모아 생존할 수 있었지만, 절망감은 가시지 않았다. 밤마다 그는 불빛도 없는 검은 하늘 아래서 구조를 기다리며 잠들었다. 그럴 때마다,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마음을 짓눌렀다.
어느 날, 섬 깊숙한 곳을 탐사하던 은성은 작은 동굴을 발견했다. 동굴 안에는 고대의 유적 같은 돌 조각과 함께 낡고 허름한 양피지 한묶음이 놓여 있었다. 양피지는 겉으로 보기엔 별것 없어 보였지만, 첫 페이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네가 원하는 것을 그려라. 그것이 현실이 될 것이다.”
분명히 고대어로 적힌것 같은데 그 언어가 머리로 먼저 이해되면서 해석이 되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처음엔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절박한 상황에선 무엇이든 시도해볼 가치가 있었다. 은성은 동굴 근처에 떨어져 있던 나뭇가지를 사용해 양피지에 조그마한 물병을 그렸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의 앞에 정확히 똑같은 물병이 나타났다. 물병은 실제로 물로 가득 차 있었고, 그것은 진짜였다.
그는 혼란스럽고 흥분된 마음으로 이것이 단순한 꿈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양피지는 무엇이든 현실로 만들 수 있는 마법 같은 도구였다. 이제 그는 이 섬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은성은 양피지를 들고 밤새 고민했다. 그는 처음엔 작은 구조선을 그릴까 생각했지만, 생각을 바꿔 대형 헬리콥터를 그리기로 했다. 헬리콥터는 훨씬 더 안전하고 빠를 것 같았다. 그는 세세한 부분까지 정성껏 그렸고, 마지막 터치를 끝내자마자 머리 위에서 강렬한 프로펠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은성은 환호성을 질렀다. 구조가 현실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그는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헬리콥터는 섬 위로 맴돌며 그를 발견하고 착륙했다. 조종사는 은성을 태우고 곧바로 섬을 떠났다.
헬리콥터 안에서 은성은 꿈같은 감정에 빠져 있었다. 그는 양피지 덕분에 목숨을 구할 수 있었고, 이제 현실로 돌아갈 수 있었다고 믿었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헬리콥터 안에서 그는 조종사와 대화를 시도했지만, 조종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비현실적으로 매끄럽고, 감정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은성은 불안감을 느끼며 창밖을 보았다. 바깥 풍경은 점점 더 기이하게 변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현실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 다른 곳으로 끌려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헬리콥터가 향하는 목적지가 점점 흐릿해졌고, 창밖의 풍경은 마치 끝없이 반복되는 바다처럼 변해갔다.
은성은 갑자기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몸을 떨었다. 양피지가 만들어낸 것은 현실이 아니라, 단지 상상 속 어느 세계였다. 헬리콥터와 조종사도 그의 그림 속 창조물일 뿐, 생명력이 없는 공허한 존재들이었다. 무엇보다 살아남았다는 안도감보다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다는 확신이 강하게 들었다. 그는 자신이 구조된 것이 아니라, 양피지가 만들어낸 환상 속에 갇혀 있었던 것이었다.
헬리콥터는 끝없이 날아가고 있었고, 은성은 다시 양피지를 꺼내야 했다. 그는 구조되었다는 환상을 깨고 이 상황을 되돌릴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이 모든 것을 멈춰야 해.” 은성은 떨리는 손으로 양피지에 새로운 그림을 그렸다. 자신이 다시 섬으로 돌아가 자연스럽게 구조될 방법을.
그러나 그림이 완성되자마자, 헬리콥터와 조종사는 사라졌고, 그는 다시 처음 발견했던 동굴 앞에 있었다. 동굴 안의 양피지는 불이 붙은것 처럼 한쪽 모서리가 새까맣게 타들어가더니 이내 완전히 연소되어 불타 없어졌다. 그제야 그는 확실히 깨달았다.
양피지는 현실을 창조하는 도구가 아니라, 사람의 욕망을 이용해 그들을 혼란과 고립으로 몰아넣는 덫이었다. 그는 양피지는 다시 손대지 않고 동굴을 떠나며 다짐했다. 이제 진짜 구조를 기다릴 것이고, 더 이상 환상에 의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며칠 후, 은성은 마침내 지나가던 어선에 의해 구조되었다. 육지에 도착한 그는 섬에서의 일을 모두 잊고 평범한 삶으로 돌아갔다. 이 섬에서 있었던 기이한 일을 누구에도 말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은성이 너울너울 수평선 너머로 완전히 사라지자, 양피지 역시 모래사막에 묻힌 유물이 서서히 드러나는것처럼 츠츠츠, 소리를 내며 복원되었다. 다시 첫페이지에는 “네가 원하는 것을 그려라. 그것이 현실이 될 것이다.”라는 글자가 새겨지기 시작했다. 다음 희생자를 기다리면서 말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