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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두필 Mar 06. 2024

아빠, 잘 가요.

2023년 8월 25일 내가 알던 아버지...

다음날도 어김없이 아버지를 보기 위해 중환자실을 찾았다.

중환자실을 갈 때마다 느꼈었던 것이지만... 참 많은 사람들이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애를 쓰고 있다고 느꼈다.

환자뿐만이 아닌 보호자 의료진들 모두 다 말이다.

그 당시에 나는 아버지를 최대한 많이 보기 위해 노력했다.

아버지의 상태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나 스스로 아버지가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열심히 부정을 했지만 본능적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점점 아버지가 힘이 없어져 가고 있는 것을 말이다.


저 멀리 보이는 아버지.

아버지와 같이 살 때 빼고는 그렇게 자주 본 적이 있던가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그리고 그전에 좀 더 찾아뵙고 좀 더 자주 연락을 할걸...이라는 후회를 어김없이 이제와 하게 된다.

모든 사람이 다 같지 않을까?

결국 떠나보내면 더욱 후회가 되고 그리워지는 것 말이다.


어쨌든 그날의 아버지는 의식을 찾고 눈을 뜨고 계셨다.

여전히 인공호흡기를 끼고 있어서 말은 나누지 못했지만 눈인사 정도를 할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을 가졌던 것 같다.

그렇게 한참을 서로 말없이 쳐다보고 있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아버지와 눈을 마주친 적이 있던가?

그 와중에도 정말 어색한 시간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아들과 아버지의 눈 맞춤은 참... 쉽지 않다.

그 상황이 최악의 경우라도 말이다.

그러한 어색한 시간을 깨기 위해 내가 먼저 말했다.


"아빠... 정신이 쫌 들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아버지였다.


"어제는 아빠가 계속 자고 있어서 얼굴만 보고 갔어... 그리고 기관 삽관 해서 조직도 떼어냈어... 꽤 많이 떼어냈으니까 아마 조직 검사 결과도 곧 나올 거 같아... 결과가 나오면 진단도 나올 거고...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아빠..."


"..."


조직검사... 참 어렵게 어렵게 해낸 검사이다.

어렵게 해낸 만큼 진단이 나와서 꼭 치료를 할 수 있기를 난 간절히 바랐다.

아마 말은 할 수 없어도 아버지도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어떠한 진단이라도 내려지길 말이다.

그래야 어떠한 치료라도 시도를 할 수 있을 거라 난 생각했다.

말을 할 수 없는 아버지에게 내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애들 많이 컸어... 우리 애들이랑 또 아빠 딸내미랑 영상 통화 좀 하자."


아버지께 아이들과 여동생을 보여주고 싶었다.

조금 잔인할 수 있지만 아버지가 살려는 의지를 더 갖기를 바라서 그랬던 것도 있다.

이기적이지만 이렇게 라도 아버지가 의무감을 가지고 살려고 노력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핸드폰을 꺼내 들어 나의 아내에게 전화를 해 아이들을 보여주었다.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를 낀 아버지를 보며 아들 녀석이 말했다.


"꼬꼬 하부지 아파? 아프면 병원 가야 돼요."


연신 아프면 병원을 가야 한다고 외쳐대는 첫째 놈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 둘째 손녀도 연신 호흡기를 낀 할아버지를 뚫어져라 관찰하고 있었다.

그래도 손자 손녀라면 미소를 지어 보이던 아버지였는데... 약에 취해서일까? 아무런 표정이 없었다.

하지만 눈을 계속해서 부릅뜨며 아이들을 눈에 담으려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이어진 여동생과의 영상통화.

여동생도 아버지의 상태를 보고 조금은 놀란 듯하였지만 이내 자연스럽게 자신의 딸을 보여주며 통화를 하였다.

그렇게 손주 손녀들과의 영상통화가 끝나고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


그렇게 쳐다보던 아버지는 내게 인상을 쓰며 손짓으로 이제 그만 가라고 한다.

어딘지 익숙한 표정의 아버지.

말을 못 하는 아버지였지만 내 귀에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어서 가~ 난 괜찮으니까 어서 가."라고 말이다.


그때 비로소 내가 알던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인상을 팍 쓰며 항상 짜증 내듯이 가라고 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잠깐이지만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난 안다.

이럴 때는 가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아버지는 항상 그랬다.

자신의 약한 모습을 나에게 보여주기 싫어하셨다.

그렇기에 난 면회시간이 채 지나가기도 전에 중환자실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 아버지를 알기에 말이다.

그렇게 또 아버지의 와의 하루가 지나갔다.


점점 아버지와의 시간이 깎여 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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