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다는 의미
무언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는 건 의미가 없었다. 가만히 서 있다가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 가진 않지만, 무언가를 잡기 위해 어둠 속을 헤매고 다닌다고 승산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배가 고픈 걸 보니, 아직 살아 있나 보네.’
그때였다. 선우의 오른쪽 귀 바로 옆에서 성별을 구별하기 힘든 중성적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맞아. 아직 살아 있어.”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아보았지만, 어둠 속이 익숙해져도 여전히 보이는 것은 없었다. 이번에는 왼쪽 귓가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인간들은 항상 보려고만 하지. 눈으로 볼 수 없을 땐, 눈을 감고 집중해야지. 안 그래?”
왼쪽에서 시작된 소름이 오른편으로 건너왔지만, 선우는 얼굴표정을 흐트러트리지 않았다. 자신이 볼 수 없다고 해서 지금의 목소리도 동일한 경험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형태가 보이지 않을 때는 신중해야 한다. 선우는 눈을 감았다. 심호흡을 하며 소리에 집중을 하자, 주위가 환해지기 시작했다.
“재미있군. 여기에 들어오는 자들은 모두 뭔가를 찾으려고 분주하게 돌아다녔는데, 자네는 아니라서 마음에 들었어. 선우, 답을 찾으러 온 건가? “
“제 이름을 어떻게 알죠?”
“그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건 내가 널 아직 죽이지 않았다는 거지. 사실 난 네게 빚이 있어. 그걸 갚고도 죽일지 말지는 내 몫이지만. “
“빚이라고? “
“그래, 빚. 드디어 청산할 수 있겠군. 손을 펴봐.”
“당신을 어떻게 믿고요? “
“그럼 이미 죽었겠지. 난 약속을 이행하는 것뿐이야. “
“그 약속이 뭔 줄 알고 믿어야 하죠?”
“하하하하 멍청한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똑똑하군. “
차가운 손길이 오른쪽 뺨으로 흘러내렸다. 선우는 몸을 움직일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아냈다.
“자네가 모르는 과거 하나를 보여주겠어. 그러고 나서 더 궁금하거나 날 믿어보기로 결정했다면, 손을 펴도록 해. 그 두 가지 보물과 함께 말이야. “
밝게 빛나던 주위가 더 환하게 비추더니 선우의 눈앞에는 산모와 남자가 있었다. 그들에게 선우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산모는 산달이 코 앞인 듯, 커다란 배를 움켜 잡으며 남자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이 아이가 오늘을 넘겨서 태어나야만 해요.”
“하지만 당신이 죽을 수도 있어.”
“그건 상관없어요. 이 아이가 오늘 태어나면, 더 이상 주어진 운명을 피하긴 어렵겠죠. 그게 길조로 이어질 수 있다지만, 지금까지는 전부 재앙으로 이어졌어요. 확률로만 따진다면, 이미 결정 난 거라고요. “
“그래서 어쩌자는 거야? “
“방법이 있어요. 우리 둘 다 죽여요.”
“그럴 순 없어. 당신은 0.001의 희망도 믿는 사람이지 않았던가? 게다가 우리가 기다렸던 아이잖아. “
“희망을 믿었기에 이 아이를 지켰어요.. 근데 이젠 모르겠어요.. 이런 말을 하는 내 심정을 알겠어요? “
산모의 눈에서는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이 아이가 예언 그대로 태어나면 수많은 잡귀들이 몰려오겠죠. 그뿐이라면 우리가 막으면 돼요. 하지만.. “
“우리에게도 힘이 있어. 난 둘 다 지킬 거야. “
그 순간 집의 창문이 깨지면서 검은 눈을 한 군사집단들이 무기를 들고 들어와 남자의 목을 베어버렸다. 동시에 여자가 손을 쓰기도 전에 기절시켰다.
자동차 안에서 여자는 희미한 의식이 되돌아오고 있었다. 그들이 자신을 아디로 데려가려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아이를 산채로 꺼내서 제사를 지내겠지. 그리고는 그 힘을 이어받거나, 자멸하겠지. 여자는 두 손에 힘을 모아 자신의 양 옆을 지키던 이들의 심장을 차례로 꺼내었다. 피가 묻은 두 손으로 염력을 써서 전봇대를 움직여 운전자가 즉사하였다. 차는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때마침 참 잘된 일이었다. 여자는 눈물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여자를 흔들어 깨우는 한 남녀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여자가 다시 깼을 때는 병원이었고,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