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들은 기력이 약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강식품은 단연 홍삼이다.
인삼은 오랜 세월 약재로 귀하게 여겨져 왔다. 자연에서 나는 산삼은 채취량이 한정돼 있어 귀한 존재였다. 그렇기에 인삼을 인공적으로 재배하려는 시도는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시행착오와 경험을 거쳐야 했다.
이 재배의 시작이 바로 전남 화순, 그중에서도 동복면 모후산 일대였다는 점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전라남도 화순군 동복면 모후산의 울창한 숲 사이로, 한국 인삼의 뿌리가 깊이 박혀 있다. 이곳은 단순한 산골 마을이 아니다.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인삼 재배의 발상지로, 학계와 고문헌이 입을 모아 인정하는 역사적 성지다.
2009년 화순군이 주최한 국제 산삼 심포지엄에서 강원대학교 박봉우 교수와 김용환 한국조경수협회장은 「고려인삼 시원지 고찰 및 재배역사」 논문을 통해 고려시대 이후 인삼의 인공재배가 본격화된 지역으로 동복면을 지목하였다.
동복은 단순한 후보지가 아니라, 고문헌과 구전, 지리적 정황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한 결과 가장 신빙성 있는 시배지로 평가받았다.
이를 뒷받침하는 역사적 기록은 다음과 같다.
1824년 편찬된『중 경지(重慶志)』에는 “전라도 동복현에 사는 여인이 산에서 인삼 종자를 얻어 밭에 심고 이를 최 씨에게 전해 번식한 것이 가삼(家蔘)”이라는 기록이 등장한다. 이는 자연삼에서 인공삼으로의 전환이 이뤄진 시점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이다.
이어 1911년에 간행된 『소호당집(小浩堂集)』에서는 그 여인이 김 진사의 며느리였고, 최 씨가 그 인삼을 쪄서 기력을 약하게 만든 뒤 판매한 것이 홍삼의 기원이라는 사실까지 서술되어 있다. 이는 단순한 재배뿐 아니라 가공방식, 즉 홍삼 제조의 시초 또한 동복에서 비롯되었음을 시사한다.
뿐만 아니라 『증보문헌 비고(增補文獻備考)』(1903)에는 관찬기록으로서 인삼과 홍삼 제조의 최초 지역으로 동복이 언급되며, 『국역성호사설』(1989)에서는 모후산의 옛 지명 ‘나복산(蘿匐山)’이 중국 요동에서 산삼을 부르던 ‘산나복’과 어원이 같다는 언급이 있어, 동복이 인삼의 시배지라는 전통을 뒷받침하는 언어학적 증거로도 작용한다.
이러한 문헌적 기록 외에도 모후산에는 인삼 종자를 산신령에게 받아 재배를 시작했다는 구전설화와 ‘개삼터’라 불리는 최초 재배지를 뜻하는 지명이 남아 있어, 이 일대가 인삼문화의 살아 있는 유산임을 보여준다.
동복삼은 당시 개성상인들을 통해 전국으로 유통되었고, 심지어 중국과 일본까지 전파되었다고 전해진다. 특히 개성인삼의 명성이 높아지기 전, 동복의 인삼재배 기술과 홍삼 가공법이 그 뿌리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화순은 고려인삼 문화의 ‘잊힌 심장부’라 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 전후에는 다시 인삼재배가 시도되었고, 이후 산양삼 등의 형태로 계승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화순군은 이 유산을 현대에 되살리기 위해 힘쓰고 있다. 모후산 고려인삼 시원지 복원 프로젝트는 단순한 복원이 아니라, 지역의 정체성을 다지는 일이다.
생태 숲 조성과 학술 연구, 산양삼과 홍삼 브랜드화는 화순을 전국 최고의 인삼 메카로 만들고 있다. 지역 축제와 인삼 상품은 동복삼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며, 방문객들에게 화순의 맛과 이야기를 전한다.
화순 동복의 인삼은 단순한 농산물이 아니다. 산신령의 전설, 농부들의 손길, 상인들의 발걸음이 얽힌 문화다. 화순은 이 유산을 지키며, 인삼의 뿌리를 더욱 깊이 내리고 있다.
참고문헌
박봉우, 김용환, 「고려인삼 시원지 고찰 및 재배역사」, 2009 국제 산삼 심포지엄 논문 발표
『중 경지(重慶志)』(1824, 김이재 편)
『소호당집(小浩堂集)』(1911, 김택영 저)
『증보문헌 비고(增補文獻備考)』(1903, 김택영 등 편찬)
『국역성호사설』(1989)
한국인삼협회, 『진짜 고려인삼 이야기』, 2004
디지털화순문화대전 “산죽 산양삼”, “모후산” 항목
데일리안, <1500년의 비밀 화순 동복삼의 역사성 입증④>, 2011-01-30
「화순군 주최 2009 국제 산삼심포지엄」, 농수축산신문, 2009-0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