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솔 Dec 10. 2022

내가 가진 비밀병기

폐에 결절이 생겼다는 걸 처음 알게 된 건 2018년 회사 건강검진을 통해서였다. 매년 심장초음파, 뇌 MRA 등의 선택 검사를 이거 저거 돌려서 해보다 그 해 처음으로 선택해본 저선량 폐 CT. 건강검진을 할 때마다 약간의 두려움이 있기 마련이지만 특별히 폐에 대해 더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얼마 후 받은 검진 결과서에 폐에 결절이 있다고 나왔다. 7mm, 5mm 우하엽.. 어쩌고 저쩌고. 6개월 추적 관찰을 요함. 처음엔 결절이라고 해서 살짝 겁이 났지만, 엄마에게 말하니 원래 사람은 다 결절이 한두 개씩 있다며 대수롭지 않은 반응에 마음을 놓았다. 추적 관찰을 요한다는 코멘트가 있었지만 의례적으로 하는 말로 여겼다.


이후 몇 년 동안 폐에 대한 생각은 아예 잊고 지냈다. 그럼에도 건강검진을 하러 가면 지난 검사 결과를 검토해주시는 상담 선생님 덕분에 매년 추적검사를 통해 데이터를 쌓았다.




그리고 올해 건강검진. 국가검진이라 당연히 폐 CT는 항목에 없었다. 물론 나 또한 폐를 볼 생각도 없었고. 모든 검사들을 마치고 상담시간이었다. 엘리베이터에 붙어있던 폐 CT 광고지를 본 게 생각나 코로나 이후 사람들이 실제로 폐 CT를 많이 찍는지 물었다. 그러자 내 지난 기록들을 살펴본 선생님이 추적하던 이력이 있으니 찍어보자고 권유하시기에 옷을 다시 갈아입고 와서 검사를 진행했다. 이 검사를 통해 폐결절이 커졌다는 게 발견됐다. 폐암 소견이었다. 당장 큰 병원에 방문해야 한단다. 갑자기 덜컥 내 앞에 나타난 암이라는 단어에 현실감이라곤 없어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폐암 소견에서 폐암 확진이 되기까지 넉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지난주에 암 제거 수술을 받았고, 조직검사 결과 내 병의 정확한 명칭은 폐선암 1기였다. 다행히 1기 중에서도 가장 예후가 좋은 최소침습암(MIA : minimally invasive adenocarcimoma)으로 판명이 났다. 수술 후 몸의 회복도 빠른 편이라 일상생활을 하는데 큰 무리가 없으니 참 감사한 일이다. 지난 넉 달 동안 큰 파도가 몰려왔고 온몸으로 겪었으며 이제는 서서히 지나가고 있다. 이번 일로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많은 감정들을 만났고, 나라는 사람의 막연했던 실체를 조금 더 알게 됐다.


마음이 단단한 사람. 그게 나였다. 잘 견뎠다고 스스로를 쓰담쓰담해본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이 내가 잘 대응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다. 나는 결코 다가오는 파도를 막을 재간이 없다. 온몸으로 맞을 수밖에. 다만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입장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법을 익혔다는 것. 거기에 한 가지 더한다면 세상이 나를 살피는 사랑의 손길을 더 세심하게 느끼며 힘을 얻는 것. 스스로 행복한 자가 되는 것, 그것이었다.  




만약 검진센터 의사 선생님이 검사를 권유해주지 않았다면? 병원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폐 CT 광고 전단지를 보지 않았다면? 선생님의 권유에 다음에 찍어보겠다고 했다면? 다른 병원을 갔었더라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 가지 않았더라면? 그날은 수많은 만약이 한순간에 만나 이룬 한 점의 역사였다. 그 안에서 선택의 주체가 나라지만 정작 나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것 같다. 우연들이 서로 얽히고 얽혀 그들의 이야기를 내 삶으로 표현해 낸 것뿐. 병원 상담실에서 선생님과 마주하고 앉은 한 장면이 내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순간이었는지 되돌아보면 아찔하다. 평범한 일상에서 인생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우연과 선택이 매 순간 펼쳐지고 있었다니...



선택과 우연은 결국 같은 의미이다.


우연처럼 찾아온 것도 결국엔 선택이었다. 내가 선택했다고 하기엔 순간을 함께 이루어낸 우연의 요소들이 참 많다. 암이라는 것도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돌아본다면 우연한 선택들이 모이고 모여서 이루어진 하나의 모습일 거다. 되돌아본다한들 그 점들을 찾아 선으로 엮어 길을 표시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 길을 찾았다고 해서 다른 이들에게 이정표로 알려줄 수도 없다. 내 삶을 만들어가고 있는 우연들의 이야기이기에 나에게만 이정표 일지 모르니까.




작은 선택 하나에서도 수많은 인생이 펼쳐지니 매 순간마다 새로운 기회가 열리고 있다. 이런 생각을 하니 인생이 긍정적으로 느껴진다. 매 순간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는 기분. 좋은 것이 다가올 수 있다고 기대하는 마음. 불운한 일이 생겼다고 해도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마음. 이런 마음이 나를 살리는 태도가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삶을 긍정하면서 나아갈 수 있는 인생의 태도. 이것이 바로 내가 가진 비밀병기이다.  

이전 08화 폐 수술 많이 아프나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