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에 결절이 생겼다는 걸 처음 알게 된 건 2018년 회사 건강검진을 통해서였다. 매년 심장초음파, 뇌 MRA 등의 선택 검사를 이거 저거 돌려서 해보다 그 해 처음으로 선택해본 저선량 폐 CT. 건강검진을 할 때마다 약간의 두려움이 있기 마련이지만 특별히 폐에 대해 더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얼마 후 받은 검진 결과서에 폐에 결절이 있다고 나왔다. 7mm, 5mm 우하엽.. 어쩌고 저쩌고. 6개월 추적 관찰을 요함. 처음엔 결절이라고 해서 살짝 겁이 났지만, 엄마에게 말하니 원래 사람은 다 결절이 한두 개씩 있다며 대수롭지 않은 반응에 마음을 놓았다. 추적 관찰을 요한다는 코멘트가 있었지만 의례적으로 하는 말로 여겼다.
이후 몇 년 동안 폐에 대한 생각은 아예 잊고 지냈다. 그럼에도 건강검진을 하러 가면 지난 검사 결과를 검토해주시는 상담선생님 덕분에 매년 추적검사를 통해 데이터를 쌓았다.
그리고 올해 건강검진. 국가검진이라 당연히 폐 CT는 항목에 없었다. 물론 나 또한 폐를 볼 생각도 없었고. 모든 검사들을 마치고 상담시간이었다. 엘리베이터에 붙어있던 폐 CT 광고지를 본 게 생각나 코로나 이후 사람들이 실제로 폐 CT를 많이 찍는지 물었다. 그러자 내 지난 기록들을 살펴본 선생님이 추적하던 이력이 있으니 찍어보자고 권유하시기에 옷을 다시 갈아입고 와서 검사를 진행했다. 이 검사를 통해 폐결절이 커졌다는 게 발견됐다.폐암 소견이었다. 당장 큰 병원에 방문해야 한단다. 갑자기 덜컥 내 앞에 나타난 암이라는 단어에 현실감이라곤 없어 어떤 말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폐암 소견에서 폐암 확진이 되기까지 넉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지난주에 암 제거 수술을 받았고, 조직검사 결과 내 병의 정확한 명칭은 폐선암 1기였다. 다행히 1기 중에서도 가장 예후가 좋은 최소침습암(MIA : minimally invasive adenocarcimoma)으로 판명이 났다. 수술 후 몸의 회복도 빠른 편이라 일상생활을 하는데 큰 무리가 없으니 참 감사한 일이다. 지난 넉 달 동안 큰 파도가 몰려왔고 온몸으로 겪었으며 이제는 서서히 지나가고 있다. 이번 일로 그동안 경험하지 못한 많은 감정들을 만났고, 나라는 사람의 막연했던 실체를 조금 더 알게 됐다.
마음이 단단한 사람. 그게 나였다. 잘 견뎠다고 스스로를 쓰담쓰담해본다. 하지만 이 모든 일들이 내가 잘 대응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다. 나는 결코 다가오는 파도를 막을 재간이 없다. 온몸으로 맞을 수밖에. 다만 가지고 있는 것이라면 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입장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법을 익혔다는 것. 거기에한 가지 더한다면 세상이 나를 살피는 사랑의 손길을 더 세심하게 느끼며 힘을 얻는 것. 스스로 행복한 자가 되는 것, 그것이었다.
만약 검진센터 의사 선생님이 검사를 권유해주지 않았다면? 병원 엘리베이터에서 우연히 폐 CT 광고 전단지를 보지 않았다면? 선생님의 권유에 다음에 찍어보겠다고 했다면? 다른 병원을 갔었더라면? 그날 그 시간 그곳에 가지 않았더라면? 그날은 수많은 만약이 한순간에 만나 이룬 한 점의 역사였다. 그 안에서 선택의 주체가 나라지만 정작 나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는 것 같다. 우연들이 서로 얽히고 얽혀 그들의 이야기를 내 삶으로 표현해 낸 것뿐. 병원 상담실에서 선생님과 마주하고 앉은 한 장면이 내 인생에서 얼마나 중요한 순간이었는지 되돌아보면 아찔하다. 평범한 일상에서 인생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우연과 선택이 매 순간 펼쳐지고 있었다니...
선택과 우연은 결국 같은 의미이다.
우연처럼 찾아온 것도 결국엔 선택이었다. 내가 선택했다고 하기엔 순간을 함께 이루어낸 우연의 요소들이 참 많다. 암이라는 것도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 돌아본다면 우연한 선택들이 모이고 모여서 이루어진 하나의 모습일 거다. 되돌아본다한들 그 점들을 찾아 선으로 엮어 길을 표시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 길을 찾았다고 해서 다른 이들에게 이정표로 알려줄 수도 없다. 내 삶을 만들어가고 있는 우연들의 이야기이기에 나에게만 이정표 일지 모르니까.
작은 선택 하나에서도 수많은 인생이 펼쳐지니 매 순간마다 새로운 기회가 열리고 있다. 이런 생각을 하니 인생이 긍정적으로 느껴진다. 매 순간 모든 가능성이 열려있는 기분. 좋은 것이 다가올 수있다고 기대하는 마음. 불운한 일이 생겼다고 해도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마음. 이런 마음이 나를 살리는 태도가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삶을 긍정하면서 나아갈 수 있는 인생의 태도. 이것이 바로 내가 가진 비밀병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