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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솔 Jan 11. 2023

내게 병이 사라진 이유

힘 빼고 삽시다

일상으로 돌아온 지 한 달이 지나간다. 한 달 사이 22년이 지나고 23년이 시작됐다.


12월의 마지막 주에는 제주에서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일주일을 제주에서 보내면서 편안함 속에서 한 해를 마무리하고자 했다. 하지만 웬걸. 지난 시간들을 돌아볼 새 없이 여행지에서의 하루하루를 즐기기에 바빴다. 먹고 싶고, 보고 싶고, 즐기고 싶은 게 정말 많은 나였다. 여행은 내가 일상으로 완전히 돌아왔음을 알리는 신호탄 같았다.  

 

하루하루 나의 상태를 관찰하고 있으면 어쩜 이렇게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지 신기하기만 하다. 어디에서도 아팠던 사람의 흔적이란 게 찾아지질 않는다. 마음 어딘가에 남아있을 거라 생각했던 암에 대한 두려움이 보이질 않는다. 하다못해 죽음의 경계를 들여다보고 왔으니 더 찬란하게 삶을 살아보겠다는 의지가 생기기라도 할 줄 알았다. 되찾은 삶이니 이제부터라도 더 열심히 무언가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야 하는 것 아닌가?



현실의 나는 병이 알려지기 전과 달라진 게 하나 없이 그대로였다. 요즘은 방학을 맞은 아이들과 씻지도 않은 채 거실에서 뒹굴며 오전 시간을 마냥 흘려보내고 있다. 삼시 세끼 차려내야 하는 매 순간이 하루의 최대 고민이고, 점심 먹고 몽글몽글 쏟아지는 잠에 못 이겨 그대로 소파에 누워 늘어지게 낮잠을 자다 오로라 공주가 잠에서 깨어나 듯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남은 하루를 보낸다.



일상의 그대로인 내가 어째 더 반갑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아마도 마음까지 회복했음의 반증이니 그러할 것이다. 나에게 지나간 일의 기억이 남아있지 않다. 지나간 일은 나에게 할 일을 하고 사라졌을 뿐이라는 걸 온몸으로 알게 됐다. 내가 과거를 붙들지 않는다면 더 이상 내 것으로 남지 않는다. 나에게 남은 것이라면 삶에 대한 겸허함이다. 나에게 어떤 것이 다가와도 그것을 잘 껴안아 볼 수 있겠다는 마음. 삶에서 좋은 일만을 기다리는 마음도 내려놓게 됐다. 삶과 함께 흘러가는 것. 내게 들어간 힘을 모조리 빼는 것. 그것이 살아가는 지혜가 아닐까.



삶과 함께 흘러가며 힘을 빼는 것이라 하면 자칫 무료한 인생, 주체가 없는 수동적인 느낌이 먼저 떠오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삶과 함께 흘러간다는 것은 진심을 담아야만 가능한 일이다. 삶 앞에서 나를 감추려면 여간 힘이 들어가는 게 아니다. 나를 더 진실로 드러내고 매 순간을 진실하게 살아내야만 한다. 그렇기에 일상이 충만하게 채워진다. 진실했기에 매 순간 내가 환히 빛나고 있다. 나는 매 순간 진실해지길 선택하고 있다. 더 이상 거짓된 상념이 나를 흐리지 않도록 나는 나를 또 들여다본다. 거짓은 진실 앞에서 힘을 쓸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내 병이 사라진 이유다.   



이번 주말 나는 뮤지컬 공연 무대에 오른다. 퇴원 후 이제 한 달 남짓한 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무대에 오를 수 있다는 현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내게 찾아온 삶이다. 내 의지로 끌어당긴 일이 아니다. 나는 이번에도 마음에 진실했을 뿐이다. 무대 위에서 나를 내려놓고 내 안의 것을 꺼내는 과정을 미치도록 열망하는 나는 예스라고 답할 수밖에 없었다. 무대 위에서 내가 사라지기를, 아무도 나를 찾지 못하기를. 더 진실해지기를 소망한다.  



고로 힘을 빼고 진실해지는 삶은 무료해질 틈이 없다. 아니 그 반대. 꽉 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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