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자의 반, 타의 반

초등 편

by My Way

제가 생각했던 아이의 초등학교 1학년 모습은 오전 수업, 혹은 급식 후 집에 와서 간식을 먹고,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실컷 놀다가 해질 무렵 집에 돌아와 다음날 등교 준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은, 등교 첫날부터 완전히 깨져버렸습니다.


아직 학교 생활이 서툴고 적응이 필요해, 하교 시간에 엄마들이 정문 앞에서 기다리던 입학 초기에도 아이들은 방과 후 각종 학원으로 흩어졌습니다. 하지만 저와 아이 아빠는 '초등 1학년이 과학, 수학, 영어 학원에 꼭 다닐 필요가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기에, 주변의 사교육 열풍에도 쉽게 휩쓸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 소신과는 달리, 결국 저도 아이가 초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태권도학원(1~6학년), 피아노학원(1~3학년), 미술학원(1학년)에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결정에 이르게 된 이유와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 번째, 방과 후에 함께 놀 친구가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한창 친구들과 뛰어놀기 좋아할 그 시기에 놀 친구가 없다는 건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이와 함께 친구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엄마, 학교 앞 OO 태권도장에 친구들이 많대요."


사실, 아이가 어린이집에 다닐 무렵, 제 로망(?)도 있고 해서 태권도를 가르쳐 볼까 하고 태권도장에 데려간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아이가 어려서 그런지 겁을 먹어 시작도 못한 채 돌아왔었습니다(1편 20화 참조).


그래서 비록 친구들을 찾는다는 명분이긴 했지만, 태권도장에 가보겠다는 아이의 결정이 내심 반가웠습니다. 그날 방문차 들른 태권도장에는 또래 친구들이 수련 중이었고, 관장님과 아이들이 먼저 인사를 건네자, 아이도 용기를 내어 한 시간가량 어울리다 집에 돌아왔습니다.


그때부터 평일 방과 후에는 곧장 태권도장에 들렀다 하교하는 루틴이 생겼고, 그 루틴은 검은띠(3단)를 딸 때까지 쭉 이어졌습니다.

687275274761a.jpg?imgSeq=57894


두 번째, 음악 이론을 가르쳐줄 곳이 필요했습니다.

하루는 아이가 태권도장에서 돌아와 간식을 먹으면서, 피아노학원에 다녀야 할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갑자기? 왜?"

"오늘 음악 수업 시간에 선생님께서 악보를 보고 계이름으로 부르라고 하시더라고요. 음악 기호 같은 것도 말씀하셨는데, 저만 모르는 것 같고요."


솔직히, 아이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학교에서 처음부터 하나하나 가르쳐 주는 게 아니라, 이미 사전 교육을 받았다는 전제 하에 수업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 너무 뜻밖이었습니다.

결국, 순전히 음악 이론을 배우기 위해 태권도장 맞은편에 위치한 피아노학원을 1주일에 한번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피아노학원은, 아이 스스로 악보를 읽고, 악상 기호를 이해하며, 피아노를 자유자재로 연주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고 판단될 때까지 다녔고, 어느 날 "그만 다녀도 될 것 같아요."라는 아이의 말에 자연스럽게 중단되었습니다. 그게 3학년 말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때 익힌 피아노 실력은 지금도 가끔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데 쓰이고 있는 듯합니다.


세 번째, 아이의 자존감을 지켜주고 싶었습니다.

학교에서 미술 수업을 했는데, 아이의 그림이 독특했는지 친구들이 아이의 것을 무시하고 놀리는 일이 생겼습니다.


제가 봐도 아이의 그림과 미술 작품들은 분명 일반적이진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접은 딱지로 뭔가를 만드는 수업을 하면, 대부분의 아이들이 X자 모양이 앞으로 보이도록 구성하는데, 제 아이는 그걸 뒤집어서 작품을 만들었고, 색감 역시 굉장히 독특했습니다. 그래서 교실에 전시된 작품들 중 조금 특이하거나 눈에 띄는 것들은 거의 다 제 아이의 것들이었습니다.


그런 모습들이 저는 재미있고, 흥미로웠습니다. 그래서 단 한 번도 아이의 작품이 이상하다거나 못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다행히 그 당시 담임선생님께서도 아이의 미술 작품에 대해 부정적인 말씀은 따로 하지 않으셨던 것 같은데, 친구들 눈에는 영 이상하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물론, 그런 일로 쉽게 주눅이 들 아이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남다른 예술감각이 정형화된 평가 기준으로 꺾이지 않기를 바랐고, 혹시나 마음에 상처를 입지는 않았을까 하는 걱정이 되긴 했습니다. 그래서, 아이의 자존감을 북돋아 줄 목적으로 '창의미술학원'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창의미술학원은 초등학교 1학년때 1주일에 한번, 약 6개월간 다녔습니다.

선생님과 1:1 수업을 통해 그림을 그리거나 재료를 체험하는 등의 수업을 했고, 무엇보다 선생님과 함께 작품을 만들어 나가면서 자신의 그림이 '틀린 것'이 아니라 조금 '독특하고 다른 것'이라는 확신을 얻게 된 것 같습니다.

그 후로는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만의 방식대로 작품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6872755d95f7a.jpg?imgSeq=57896


다만, 그런 아이의 예술 감각을 진심으로 알아봐 주시는 선생님들은 많지 않아서, 성적을 매기는 미술 과목 점수는...


그렇게 제 아이는 예체능 과목에 한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방과 후 사교육을 받게 되었지만, 국어와 수학 같은 기초 과목은 집에서 스스로 공부를 해나갔습니다.




[열여섯 번째 고슴도치 시선] 어느 날, 아이의 책가방에서 작은 수첩 하나를 발견해 열어보았습니다. 그 안에는 같은 반 친구 29명의 이름과 각 아이의 특징들이 깨알같이 적혀있었습니다.

김 OO : 수학을 잘함. 목소리가 큼. 수업 시간에 질문을 많이 함.

박 OO : 우리 반 반장. 말발이 셈.

서 OO : 아직 대화해보지 못함. 좀 더 관찰이 필요함. (이하 생략)

친구들을 바라보는 아이만의 시선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그 수첩을 보며, 다시금 호기심도 많고 관찰력이 뛰어난 아이임을 느꼈습니다.




[다음 이야기] 'Why?' 덕분에

keyword
이전 03화초등 적응의 열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