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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감상] 끄라비, 박형서 作

단편에 대한 단편

by 오로지오롯이


『끄라비』는 박형서 작가의 단편소설집으로,

박형서 특유의 실험적이고 지적이며 유머러스한 서사를 통해 인간 존재와 삶의 의미를 탐구한다.


『끄라비』의 수록작들은 현실과 비현실, 과거와 현재, 인간과 공간의 경계를 허물며,

독자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끄라비'는 단순한 지리적 장소를 넘어,

인간의 감정과 기억이 투영된 인격체로 형상화되며,

공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을 이끌어낸다.


이러한 서사는 박형서가 추구하는 문학적 실험과 철학적 탐구의 결과물이다.



작품 스타일


박형서 작가는 사소한 일상의 이야기부터 인류 문명사와 우주 진화론에 이르는 거대한 서사까지 폭넓은 스케일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이야기꾼이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실험적 서사와 기상천외한 상상력으로 주목받았으며, 인과성이나 개연성에서 벗어난 판타지적 요소가 강하게 드러난다. 이러한 서사는 유머, 철학, 신화, 과학 등 다양한 담론을 능숙하게 활용하여 기존 소설 형식을 전복하고, ‘자정의 픽션’이라 불리는 독창적인 문학적 실험을 펼친다.


시간이 흐르며 박형서의 작품은 묵시록적 상상력과 타나토스적 충동에서 출발해 점차 문명과 우주 진화라는 광대한 주제로 확장된다. 유머와 멜랑콜리, 치밀한 논증이 어우러진 세련된 문체 속에서, 그의 소설은 세상과 인간을 새롭게 성찰하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새벽의 나나』처럼 일상과 여행, 인간 관계의 복잡한 얽힘을 통해 삶을 돌아갈 수 없는 여행으로 바라보는 깊은 통찰을 전하는 것이 그의 작품 세계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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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록작 中 [끄라비] 감상


낭만적이고 평범한 공간 묘사


소설의 초반부는 이국에서의 낭만적이고 평범한 감상으로 시작된다. 끄라비는 태국의 섬인데, 열대나무, 석조의자, 투명한 해수, 절벽, 바람 등 공간의 분위기를 디테일하게 잘 형상화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왠지 모르게 갈등에 긴장하는 대신에 분위기에 취해 몰입할 수 있게 한다. 그것이 이 소설의 첫 번째 차별점이다.



공간의 인격체화


두 번째로 이 소설의 특징은 끄라비라는 공간을 하나의 인격체로 형상화시킨 일이다. 끄라비라는 공간은 화자에게 있어서 최상의 낙원이고, 휴양지였다. 즉, 멋진 공간일 뿐이었다. 하지만 소설이 점점 진행됨에 따라 작가는 끄라비라는 공간을 점점 하나의 인격체로 발현시킨다. 화자는 처음 후배와 사랑에 빠진 후 “그녀가 사랑스러웠기 때문이 아니라 내게 사랑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진술한다. 즉 화자가 가지고 있는 사랑의 결핍을 끄라비에서 채우고 갔다. 그 후 다시 찾은 끄라비에서 “내가 끄라비를 그리워한 만큼 끄라비도 나를 그리워했다.”라고 표현한다. 화자는 끄라비를 사랑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끄라비가 단순한 공간이 아닌 인격체로 의인화하는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그 후 화자는 끄라비에서 실수로 고른 음식도 맛있고, 매일매일이 축제라며 마치 첫사랑에 빠진 인간의 감정을 끄라비라는 대상에 투영하고 있다. 곧 끄라비에서의 기억은 끄라비가 단순한 공간이 아닌 화자와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는 대상으로 발현된 것이다. 그 후 끄라비의 모든 것들이 화자의 감정을 이끌게 된다.



변해버린 공간과 상징으로서의 ‘비’


하지만 새 여자친구와 다시 찾은 끄라비는 예전의 것과 너무 달라져 있다. 화자는 그곳이 끄라비인 것이 의심스러웠고, 끄라비에서의 최악의 상황을 겪으며 사랑하지 않는 연인과 결별하게 된다. 이 대목이 사실 가장 흥미로웠는데, 끄라비라는 공간의 감정은 ‘비’라는 자연현상으로 형상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초반부 화자가 찾은 끄라비는 비가 많이 내리는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화자가 최상의 여행 조건을 만들 수 있도록 비가 내리지 않았다. 하지만 새 여자친구와 동행한 여행에서는 비로 하여금 둘의 여행을 최악으로 만들어 버린다. 어쩌면 단순할 수 있는 끄라비의 자연 현상을 그녀와 나 사이에 있는 제 3자의 인물로 형상화시킨 형세이다. 즉 새 여자친구와의 끄라비 여행은 화자와 끄라비라는 열렬히 사랑하고 있는 연인 앞에 새로운 여자를 소개한 격이다. 그 후 끄라비는 한 ‘여자’와 같이 돌린 마음을 다시 화자에게 주지 않는다. 곧 끄라비는 질투하고 파괴하는 무자비한 끄라비로 그려진다. 사랑은 따듯한 배려로 시작되지만 독점의 욕망으로 마무리된다.



공간과 동화된 자아


결국 끄라비가 자신을 잊었다고 판단하고 방황하던 화자는 그곳에서 아찔한 기시감마저 느꼈고, 결국 끄라비의 비를 맞으며 따뜻함마저 느낀다. 그 과정에서 화자는 끄라비라는 옛 연인과 만난 것으로도 만족하며, 지독하게 끄라비에 동화됨과 동시에 유일한 안식처였던 끄라비를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결국 결말 부분, “나는 끄라비가 되었다.”라는 표현으로 공간을 사랑했고, 공간의 버림을 받은 화자는 결국 스스로 공간이 되려 한다.



공간과 인간의 경계, 그리고 완성된 구성


결과적으로 이 소설은 공간이 공간으로 기능하지 않고, 인간이 인간으로 기능하지 않은, 공간과 인간의 새로운 경계를 다시 그려낸 색다른 느낌의 소설이라 할 수 있다. 끄라비의 지독한 질투가 화자의 감정을 이리저리 휘두르고 결국 자신에게 귀속시키는 과정과 공간을 뛰어넘어버린 끄라비가 하나의 인성, 인격으로 형상화되는 모습이 굉장히 흥미롭다. 또한 갈등이 배제되어 버린 초반부와 갈등투성이인 후반부가 대조되면서 구성상으로 안정감이 느껴진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발상과 구성이 잘 어우러진 소설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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