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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감상] 그 여름의 수사(修辭), 하성란 作

단편에 대한 단편

by 오로지오롯이


그 여름의 수사는 하성란의 다섯 번째 소설집 『여름의 맛』에 수록된 작품이다.

『여름의 맛』은 우리가 지나온 여름을 감각적인 언어로 다시 불러내는 소설집으로,

음식이라는 매개를 통해 기억과 추억, 상실과 그리움을 탐구한다.


표제작 '여름의 맛'에서는 맛의 묘사가 단순히 미각의 차원을 넘어,

육체가 본능적으로 느끼는 감각과 어린 시절의 추억을 되살려내며,

'카레 온 더 보더'에서는 평범한 향기가 특별한 만남과 시간을 불러내는 다층적 서사가 펼쳐진다.


이처럼 일상적인 사물과 음식의 세밀한 묘사를 통해 인간 존재의

내밀한 심리를 드러내는 하성란 특유의 문학적 시선을 집약해 보여준다.


수록작 중 '그 여름의 수사'는 2008년 오영수문학상과 이상문학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작품 스타일


하성란은 섬세한 문체와 따뜻한 응시로 일상과 사물을 세밀히 관찰하며 작은 에피소드에서도 깊은 의미를 끌어내는 작가다. ‘정밀 묘사의 여왕’이라는 별칭답게 미시적이고 집요한 묘사를 통해 인물의 심리와 사물의 존재감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사소해 보이는 일상에 몰두하면서도 곰팡내 나는 현실 속에서 존재의 꽃을 발견하는 독자적 미학을 구축했다.


사회적·거시적 문제에 다소 약하다는 평가도 있으나, 그는 단편 미학의 정점에서 깊이 있는 묘사와 감각적 언어를 완성해낸 작가로 인정받는다. 또한 인터뷰 때마다 노란 메모지에 직접 대답을 적는 습관처럼, 사소한 것에서 성찰과 의미를 끌어올리는 태도 역시 그의 문학 세계와 맞닿아 있다.




수록작 中 [그 여름의 수사] 감상


일상적 이야기 속 단절과 소통


하성란의 소설 ‘그 여름의 수사’에서는 어쩌면 굉장히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큰 사건들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갈등이 아닌, 우리 주변에서 느껴지는 단절과 소통의 이야기 말이다. 이 작품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통해서 주제를 하나의 포커스로 맞춘다.



아버지와 어머니, 실패한 소통


일단 아버지와 어머니의 관계에서부터 이 법칙은 크게 작용된다. 어머니는 전화기라는 쌍방향 통신 수단을 들여놓았다. 하지만 D시에 있는 아버지는 어머니와 같은 생각이 아니었다. 결국 어머니는 편지를 써야 했고, 아버지는 가끔 답장을 할 뿐이었다. 게다가 어머니는 편지를 쓰다가도 부레가 끓어올라 편지를 구겨 던지고 어깃장을 놓듯 전보를 쳤다. 그것도 기본요금에 맞춘 열 글자로 말이다. 여기서 이미 단절은 극대화되었다. 아버지는 전보의 내용을 잘 믿지 않았으며, 멀리 떨어진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단순한 열 글자의 수사(修辭)였다. 어린 아이인 ‘나’가 긴 내용을 아무리 잘 추리고 추려도, 그래봤자 열 글자인 것이다. 열 글자에 많은 내용을 넣기 위해서는 애틋함과 그리움이란 감정이 가려질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아버지와 어머니는 직접 만나더라도 대화의 시간이 오래가지 못한다. 이것은 전화, 편지, 전보로 이어졌던 소통의 노력이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름 부르기와 소통의 의미


또, 이 소설에서는 호칭에 관한 이야기도 서술하고 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여보’가 아닌 ‘아빠’라고 말한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 호칭에 맞대어 아내에게 ‘한나’라는 딸아이 이름을 부른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 것은 소통의 기회를 잃을 수 있는 것이다. 김춘수 시인이 시를 통해 가리켰던 관념이 아닐까 싶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장례식과 드러나는 단절


단절의 관계는 다른 등장인물 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바로 할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한나 가족 일행은 장례식이 아닌 다른 것들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한나’가 수영 모자에 미련을 갖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엄마는 자기 사고방식을 통한 대립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해수욕장 길목에 자리 잡은 할아버지의 집에 눈독을 들였던 것을 상기시킨다. 또한 할아버지가 할머니를 죽음에 이르게 했을 수도 있다는 장치를 마련하였으며, 친척들은 슬픔의 통곡이 아닌 단순한 의식의 행함을 보여준다. 장례식은 삼일장에서 오일장으로 의미 없이 늘어갔으며, 상여는 색색의 연꽃들이 화려하게 수놓아졌지만 그것이 사람들의 정성스러운 마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그건 곡소리를 내는 장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해안가에 상여가 들어서도 곡소리가 나지 않자 누군가 “와 곡을 안 하노” 하자 그제야 아버지가 “아고”, 하면 고모들이 따라했다. 이 장례식 풍경에서 슬픔이란 감정은 잘 찾아볼 수가 없다. 일상적이고, 또한 반복적이며 어쩌면 당연한 듯한 우리의 ‘단절’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소통의 가능성과 결말


물론 이 소설에서 관계의 소통을 차단하는 것은 아니다. 결말 부분에 다다르면 한나는 아버지에게 자기 맘대로 열 글자의 전보를 보내게 된다. “당신이너무보고싶어요” 그리고 이 전보를 받은 아버지는 드디어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즉, 이 열 글자의 문구는 진솔하고, 당당한 사람들의 감정 표현이 소통의 동기가 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것 또한 직접적이지 못하고, 또 그러기 때문에 솔직하다고 볼 수 없다. 작가는 독자에게 진정한 소통은 무엇인지 알아서 생각하도록 여운을 준 것이다.



일상 속 반복과 단절의 미학


이처럼 작가가 관찰하는 일상은 섬세하고도 반복적이다. 그리고 그 반복 속에는 단절이라는 큰 획이 중심을 잡고 있다. 그렇다.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 우리의 관계는 정말 돈독해야만 하지만 그렇게 되기란 너무 힘이 든다. 우리는 항상 단절한다. 그리고 간헐적인 소통에서 위로 받는다. 사실 이런 인간 법칙은 깨져야 함이 옳다. 일상적인 소통, 그리고 간헐적인 단절. 이것이 가장 이상적인 관념이라고 판단된다. 작가 하성란도 이런 방향을 잡아주고 싶었을 것이다. 쌍방향통신이 되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단순화하는 것, 감정이 배제되어 지속되지 못하는 관계. 현재 우리들의 모습이다.



제목 ‘그 여름의 수사’의 의미


‘그 여름의 수사(修辭)’ 왜 작가는 이런 제목을 만들어 냈을까. 일단 여름이라는 계절적 관념과 이 소설에서 말하는 ‘관계의 단절과 소통’을 비교해 볼 수 있다. ‘여름’은 가장 활기찬 계절이면서도 가장 무기력한 계절이다. 사람들은 해수욕장이나 계곡으로 휴가를 떠나고, 가까운 공원에 찾아 여유를 만끽한다. 그래서 여름은 역동적인 계절이다. 즉 사람과 사람이 부대끼고, 서로 여행을 하면서 소통을 할 수 있는 계절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 깔린 단절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여행을 떠나고, 공원을 찾아 삼림욕을 하는 것도 대부분은 무더운 날씨에 무기력해진 자신을 추스르려 하는 행동이다. 즉 단절에 염증을 느낀 사람들이 소통을 갈구하는 계절이라는 것이다. 여름은 따스하며 싱싱한 계절이지만, 그만큼 따뜻함이 지겨워지고, 빨리 상해버리는 계절이다. 이것이 소통과 단절처럼 양면성을 가진 여름의 특성이다.



수사와 소통의 확장


수사(修辭)는 말이나 글을 다듬고 꾸며서 보다 아름답고 정연하게 하는 일이다. 처음 한나가 표현하는 수사는 너무나 단순했다. 단지 열 글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나는 나이가 들면서 ‘내 속의 문장은 만연체로 화려한 수식어를 달고 길고 또 길어졌다’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점점 자신의 문장이 더 다양한 감정을 싣고, 또 더욱 성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을 어떻게 판단할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이것을 작가가 제시하는 소통의 확장이라고 결론 내렸다. 자신의 속마음을 다 털어 놓을 수 있는 더 많은 문장 성분과 수사법. 그것을 통해 사람과의 소통이 만연체의 문장처럼 더욱 길고 또 길어질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잔잔한 일상과 인간의 냄새


이 소설은 큰 사건이 벌어져서 이야기를 끌어나가기보다는 잔잔한 일상을 쓰고 있어서 그런지 인간 냄새가 풍기는 작품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그 인간들이 더욱 발산해야 하는 것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는 감정과 주관을 배제한 우리의 안타까운 세상을 관찰하고 기록하였다. 어쩌면 우리 주변의 모습을 관찰한 작가가 그런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고, 그들에게 메시지를 띄우는 노력일지도 모른다. 일상적 소통과 간헐적 단절로 이루어지는 관계를 만들어가자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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