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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방인 Mar 30. 2020

나이가 든다는 건(4)-많이 느낀다는 것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로 살아간다는 것. 모두가 바라고 모두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삶이리라. 그러나 뜨거운 머리와 차가운 가슴으로 살아왔던 것에 대한 후회와 부끄러움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일 것이다. 나 역시, 나 또한 그랬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울어본 때가 언제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혹은 살면서 가장 기뻤던 순간이 언제입니까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선뜻 대답하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많은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을 텐데 곧바로 대답이 떠오르지 않은 건 왜였을까.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시던 외숙모 근처에 살았던 덕분에 어려서부터 피아노를 배우게 되었고, 교회를 다녔던 덕분에 자연스럽게 성가대에 참여해서 노래도 하게 되었다. 노래를 하는 일은 내 입에서 나오는 숨결로 피아노 건반을 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피아노를 치는 일은, 악보에 표기된 음정을 피아노 건반에서 정확하고 빠르게 찾아 두드리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기에 피아노와 노래의 목표는 “정확성”에 있었다. 그래서 잘하지 못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정확성”에만 중점을 두다 보니, 피아노와 노래를 통해 “감정”과 “감동”을 전달해야 된다는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었다. 그래서 딱딱하고 메마른 연주와 노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즐거움”이라는 영역에서도 나의 이러한 성격은 여실 없이 드러났던 것 같다. 코미디 프로그램을 늘 즐겨보지만 크게 소리 내어 웃은 적은 별로 없었다. 즐겁고 재미있는 것을 좋아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이 신나게 웃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나 자신이 자지러지게 웃거나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면서까지 크게 웃어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감동, 눈물, 웃음 등은 사실 나와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어떠한 때라도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그 상황에서 가장 효율적이고 최상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행동을 하는데 집중해왔을 뿐, 그때그때의 상황에 내 감정이 흔들리거나 마음속으로 깊게 느껴보는 일은 어색하고 서툴기만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언제부터였을까. 한 해 한 해 나이가 들어갈수록 별 것 아닌 것에도 마음이 쓰이고,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껴지는 바가 하나둘씩 많아지기 시작했다. 뻔하고 식상한 영화에도 코끝이 찡해지는 일이 잦아졌으며, 상투적인 가사의 노래에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한 해 두 해 경험이 쌓이고 쌓여 내가 살아온 날들을 기억하게 하고 겪었던 일들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어서일까.


특히나 내가 마음이 쓰이게 된 것은 “열심”이라는 특성이다. 좋은 회사에 입사한 덕분에 신입사원 연수 때 뮤지컬을 보러 갈 수가 있었다. 내 생애 처음의 뮤지컬이었는데, 화려한 무대와 재미있는 이야기들 속에서 느껴지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배우들이 땀을 뻘뻘 흘릴 정도로 너무 열심히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스”라는 뮤지컬이 눈물 나게 감동적인 이야기는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의 열정과 혼신의 노력에 가슴속에 울컥하는 무언가가 느껴지게 되었다. 매사에 덜렁대고 열심히 하지 않는 나의 성격을 내가 잘 알아서였을까. 혼신을 다하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에서 나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나와는 다른 모습에 눈물이 핑 돌만큼 감동적이었고 손이 빨개지도록 박수를 쳤던 기억이 있다. 오래 전의 일이었지만 그 순간이 아직도 눈에 선할 만큼 나 스스로 느끼는 감정에 집중하기 시작한 계기가 된 일인 것 같다.


“공감”이라는 개념과는 좀 다른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일을 내일 같이 생각하고 도와주는 착한 사람들이 많은 반면, 나는 그러지는 못한다. 또한 어려움을 당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슬퍼해주고, 기쁜 일을 맞이한 사람들과 함께 즐거워해 주는 데에는 여전히 서툴다.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예전보다 조금 더 많이 느끼고 조금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을 뿐이다. 어떤 일을 보고 들었을 때 반응하는 비율이 머리와 가슴의 비율이 9:1에 가까웠다면 이제 겨우 8:2 정도라고 해야 되려나. 그렇지만 한 해 두 해 나이가 들어갈수록 별생각없이 매사를 지나쳐왔던 과거보다 조금씩 더 많이 느껴져가고 있는 건 사실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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