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초임을 담임으로 뽑지 않아요. 부담임부터 시작해서 차츰 준비하는게 어떨까요?”
이미 빈정이 상한 후였고, 다년간의 면접 경험으로 이미 이번 면접은 텄다는 위기감을 느낀 터라 하고 싶은 말을 하기로 작정했다.
“아뇨, 저는 담임부터 시작하고 싶습니다. 부담임 교사로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의지는 알겠으나, 처음부터 어떻게 학부모를 상대하고 아이들을 다룰 수 있겠어요?”
합리적인 의심이었으나, 구겨진 자존심을 어르고 달래다 이젠 고개를 빳빳이 들기 시작한 이상, 더는 물러설 수 없었다.
“저는 다년간 카페, 주민센터 등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볼 수 있는 서비스직에 몸을 담갔습니다. 사람을 잘 대할 수 있는 것이 제 장점이고, 아이들을 다루는 방법은 대학 다니는 4년간 실습을 통해 배웠습니다. 제가 잘할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확신이 없으시다면, 저는 담임 자리를 제안하는 다른 유치원으로 가겠습니다.”
나의 패기있는 대답에 얼굴이 빤히 보던 원장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나이가 많아서 사람 다루는 건, 왠만한 초임보다는 나을 수도 있겠네”
그놈의 나이! 나 아직 만으로 24세라고요! 소리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고, 사회용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럼 임주혜 선생님 믿고 가봅시다. 대신 다른 선생님들께는 어린이집 누리 보조로 1년 경력 있는 걸로 합시다. 초임은 담임으로 뽑지 않는다는 내 신념을 모두가 알고 있기에 내 체면도 살리고, 선생님 체면도 살리는 방향으로. 게다가 그 나이에 경력이 없다면 좀 그렇잖아?”
나를 배려하는 건지, 자신을 보호하는 건지 모를 이야기 끝에 테이블에 놓인 노란색 포스트잇을 한 장 떼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아침 먹었어요?”
포스트잇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물었다.
“아뇨”
주혜가 짧게 대답하자, 흘깃 쳐다보더니 다시 이어서 적기 시작했다.
“잘됐네, 지금 병원에 가서 공무원채용검사 받고 오면 되겠다”
원장이 다 적은 노란색 포스트잇을 건네며 말했다.
포스트잇에는 공무원 인사기록카드, 등본, 초본, 기본증명서 등 준비해야 할 서류 목록이 적혀 있었다.
“공무원채용검사에 반명함 사진 2장 들고 가야하고, 인사기록카드엔 좀 더 큰 사이즈 증명사진 붙여야하니까, 이력서에 있는 사진으로 인화해서 붙이면 되겠네”
뭐가 뭔지, 아무것도 모르는 주혜에게 염불 외듯이 줄줄줄 읊었고, 주혜는 대충 알아듣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집에 가서 서랍 안에 있는 반명함 사진 2장을 들고 병원에 가서 공무원 검사인지 뭔지 어떤 건강 검진을 받아야 한다는 데까지만 알아들었고, 나머지는 천천히 인터넷을 찾아가며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럼, 서류 다 준비되는 대로 유치원으로 갖고 오고, 출근은 2월 셋째주 월요일로 합시다.”
출근, 두근거리는 말이다. 정말 듣고 싶었던 말이기도 했다. 늘 아르바이트, 기간제, 계약직만 전전하다가 드디어 정규직으로서 첫 출근이다.
“네, 서류 준비해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고개를 까딱하며 다시 모니터로 향하는 희주에게 꾸벅 인사를 한 후, 들뜬 표정으로 원장실을 나서는 주혜에게 원감이 따라 나오며 말했다.
“임주혜 선생님, 반가웠어요. 서류 준비 잘해서 오고, 모르는 거 있으면 유치원으로 전화줘요. 잘 가요”
처음부터 따뜻했던 원감은 주혜에게 오래 일하고 싶은 유치원이라는 인상을 준 반면, 원장은 자신을 ‘나이 많은 신입’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오래 일하고 싶지 않은 유치원이라는 상반된 인상을 주었다. 어쨌든, 앞으로 부지런 떨어서 서류를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버스 정류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냥, 아이들이 좋아서요.”
뒷통수를 세게 얻어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지연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유아교육과에 진학한 것도, 유치원에 취업한 것도 다 아이들이 좋아서 한 거에요.”
“그렇구나, 학교 졸업식은 다녀왔어요?”
“네! 동기들도 금방 유치원에 취업했더라고요. 그리고 저만 부담임 겸 종일반 담임이 아니더라고요. 초임은 정담임 자리 잘 안 준다는 말이 맞나봐요.”
주혜는 뜨끔했다. 지연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주혜의 양심을 아프게 찔렀다. 주혜는 단순히 번번이 실패한 중소기업 취준을 그만두고 도피처로 택한 것이 유치원이었다. 딱히 유아들의 전인적 발달을 위한 교육에 관심이 있어서, 특히 아이들을 사랑해서 선택한 것이 아니었고, 그런 제가 열정 만수르인 지연 대신 정담임 자리를 꿰찼다는 사실이 무거운 양심에 깔려 압사 당할 거 같은 기분이었다.
“주혜씨는 나이가 어떻게 되는지 물어보면 실례이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