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암 버스 정류장에서 내려서 한참을 걸었다. 이미 밤은 깊었고, 몇 몇의 차량이 씽씽 달리는 도로와는 1미터 이상 떨어져서 걸었다. 도로와 가까워 지는지 아는 방법은 발 밑에 풀이 밟히는지 정도로 알아챘다. 어느순간 딱딱한 콘크리트 바닥을 걷는 듯 하면 안쪽으로 몸을 틀어 풀밭을 찾았다. 덕분에 여기저기 긁힌 자국에서 엷게 핏물이 흘러내렸다. 다리, 손바닥 안 쓰린 곳을 찾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내가 가고 있는 길이 맞는 길인지 알 방법이 없었다. 정말 장님이 되어 정처없이 떠돌고 있었다. 밤이 깊어서 길을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나쁜 사람이라도 만나면 그나마 있던 물건도 다 빼앗길 것이다.
“윽!”
오른쪽 어깨에 강력한 무언가가 부딪혔다. 차 소리가 들리지 않는 시골 한적한 길이 분명했는데, 누군가와 부딪힌 것이다.
“뭐..,야? 너... 죽고 싶어?”
술 냄새가 거하게 풍겨와 온몸을 휘감았다. 털끝이 곤두선 채 경계했다. 이 상황에서 이상한 사람과 엮여서 좋을 게 하나 없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앞이 안 보여서요... 이해 부탁드립니다.”
“뭐? 안 보여? 안 보이는 놈이 이 밤에 걸어다닌다고? 나랑 장난해? 어? 뭐야 눈에 저거 뭐야? 벗어봐!”
나는 당황했다.
“아... 이건 벗을 수 없습니다. 저도 벗고싶습니다만...”
취한 남자는 갑자기 달려들어서 고글을 움켜쥐었다. 나는 비명도 지르기 전에 주저 앉아버렸다. 남자는 계속해서 고글을 움켜쥐고 흔들어댔다. 그때마다 머리통이 좌우로 강하게 흔들렸다.
“벗으라고! 어디서 장난 질이야? 눈도 안 보이는 게 나를 무시해?”
남자는 더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댔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나는 저항할 수 없었다. 저항하다가는 더 위험한 일을 당할 것 같았다. 어찌되었든 오늘 죽으면 절대 안 된다.
“살려주세요... 제가 언제 선생님을 무시했다고 그러세요...”
“살려줘? 몇 대만 맞자. 내가 오늘 아주 엿같은 하루를 보냈는데 아주 잘되었다 요놈!”
“악! 악!”
단발마의 비명과 함께 입속으로 작은 잡초 향이 풍겼다. 순식간에 머리가 땅에 붙어 있었고 남자는 계속 발길질을 헤댔다. 옆구리로 280cm 짜리 기둥이 날아와 꽂혔다.
“윽... 선생님...아... 제엔장! 좀 꺼지라고!”
남자의 발질이 멈췄다. 그는 술이 번쩍 깬 듯 미동도 없었다. 나는 울부짖으며 외쳤다.
“좀! 내버려 두라고! 내일까지만 기다려보라고! 내가 내일 내 발로 찾아올테니까 제발 내일 죽여줘. 내일 이 자리에 같은 시간에 올 테니까 내일 꼭 좀 나를 죽여달라고! 오늘은 좀 넘어가자고! 나도 힘든 하루였어! 너만 힘든 줄 알어? 이 자식아!”
남자는 당황한 듯 말을 절었다.
“어... 뭐? 이 놈이 앞도 안보이면서... 에잇 퉤!”
질퍽한 무언가가 귓 볼 아래로 흘러내렸고 이내 목선을 통해 가슴쪽으로 흘러들어갔다. 나는 허공에 무의미한 주먹질을 연신 해댔지만 아무것도 걸리지 않았다. 남자는 퉤! 소리와 함께 종종 걸음으로 미친놈으로부터 멀어져갔다.
나는 한참을 미친 듯이 울부짖으며 그 자리에 누워버렸다. 정신이 점점 흐릿해졌다. 다시 센터로 찾아갈 희망도 없었다. 방향을 잃어버린 오발탄처럼 그 자리에 누워서 잠이 들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오늘만 제발 살자는 마음 뿐이었다.
따뜻한 햇살이 피부로 스며드는 기분에 눈을 떴다. 주변 공기가 확연하게 달라진 게 느껴졌다. 바람한 점 없었고, 등에는 길게 자란 풀들이 아닌 푹신한 침대가 놓여져 있었다.
“정신이 들어요?”
익숙한 목소리가 들리는 쪽을 바라보았다. 아직 고글이 벗겨지지 않았는지 앞이 보이지 않았다.
“네... 제가 어떻게 여기에 있는거죠?”
여성 강사가 답했다.
“어제 교관님 중 한 분이 순찰나가셨다가 발견하셨어요. 이곳 센터에서 100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누워계셨다고요... 상처가 많으시던데 무슨일 있으셨나요? 죄송하지만, 고글을 긴급으로 벗겨드릴 수는 있는데 그렇게 되면 바로 탈락처리가 돼서요. 본인의 의사를 물어볼 때 까지 제가 벗겨드리지 말자고 건의 드렸습니다.”
나는 배려에 감사드린다고 해야할지. 화를 내야 할지 몰라서 멈칫거렸다. 그리고는 마른 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네. 계속해야죠. 테스트... 무조건 4단계 통과해서 알약 받고 고통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져 줄 겁니다. 그 무엇도 이제 저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좀 쉬시다가 회복되시면 나가셔도 좋습니다. 방까지는 저희 교관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방에 들어오자 노인이 급히 물었다.
“자네 괜찮나? 큰일날 뻔 했다고 들었네만...”
나는 노인의 물음에 퉁명스럽게 받아쳤다.
“어르신, 그게 무슨 상관인가요? 어차피 어르신도 저도 2주 뒤에면 죽을 목숨인데 큰일이 나던 말던 무슨 상관이냐는 말입니다.”
나는 방문을 쿵 닫고 들어가버렸다. 노인하고 얘기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다같이 죽음을 향해 달리는 레이스 중에 누구 하나 트랙 밖으로 나가버려도 눈하나 깜짝할 필요 없는 곳이 이곳이다.
“기분 나아지면 얘기나 하세!”
노인은 내 방문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나는 무응답으로 답했다. 모든 것이 귀찮았다. 그저 고통없이 온전하게 내 삶을 하루빨리 끝내고 싶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전화가 울렸고 나는 휴대폰을 더듬거리면서 고생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현재 내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 듯한 하이톤의 친절한 음색이 들려왔다.
“사랑합니다. 고객님. 우리보험입니다. 오전에 생명보험 가입 관련하여 몇 가지 확인할 게 있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보험회사는 가입한 게 본인이 맞는지에 대한 질문과 수술 받은 곳이나 약을 먹고 있는 게 있는지 물었고 나는 가입을 위한 답변을 늘어놓았다. 보험회사 전화가 끊기자 마자 다시 전화가 울렸다. 아직 물어볼 게 남았던가? 하며 다시 전화를 받았다.
“아들! 너 괜찮은거야? 별일 없지? 출장은 어때? 언제 오는데?”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최대한 두려운 목소리를 숨기면서 빠르게 본인의 궁금증을 풀어냈다. 나는 최대한 괜찮은 척 맞장구를 치기로 했다.
“아이참, 엄마! 괜찮아요. 출장 2주 좀 넘게 남았으니까 끝나고 바로 집으로 갈게요! 그때까지 무탈하게 계셔야해요! 알았죠?”
“어... 엄마는 괜찮어. 별일없어. 아들, 혹시나 뭐 이상한 사람이 전화가거나 하면 꼭 경찰에 신고해야해! 특히 요즘 보험회사에서 정보 빼내가고 이런거 많다고 하니까, 혹시나 이상한 사기 전화오면 너가 한 거 아니라고 정확하게 얘기하고! 알았지? 혹시 보험회사 이런데 전화온거 없지?”
“네. 엄마. 전혀요. 안심하세요. 지금 프로젝트 발표가 있어서 나중에 전화 드릴게요! 쉬세요!”
“어 아들, 보험회사 전화 오면 꼭~ 아니라고 해야 해!”
어머니의 마지막 말을 무시한 채 전화는 끊겼다. 그 이후로 엄마는 좋은 자리가 있어서 야간 일로 업무 시간을 바꾸었다고 하셨다. 하지만 낮에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나는 낮과 밤 쉬지 않고 일을 하는 어머니의 고생스러움이 떠올라 고통스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