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그림의 단어 사전
요즘 나의 화두는 '樂(즐거울 락)'이다.
'인생에 낙이 없다'라는 생각을 자주 하는데, 그 '낙'의 근원이 이 한자이기 때문이다. 이 한자는 특이한 것이 음도, 뜻도 여러 가지이지만 약간 결이 비슷하다. '풍류 락'이라고도 하고, '좋아할 요'라고도 하고, '음악 악'이라고도 한다. 세부적인 훈도 음도 다르지만, 무엇이든 다 '즐기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느리게 읽기하고 있는 <불완전한 삶에 관한, 조금은 다른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의 상처나 현재 상황을 꽤 많이 수용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편안해지고 마음이 정돈되고 나니, 꽁꽁 닫아두고 있던 마음도, 꾹꾹 눌러놓았던 욕구도 새어 나오는 것 같다.
요즘 가장 강한 욕구가 '즐거움'인데, 어려운 것은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즐거워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여행을 가기 위해 힘든 직장 생활을 버틴다고 하고, 자녀들을 생각하며 행복하기도 하고, 좋아하는 연예인을 보며 행복을 느낀다고도 한다. 그런데 나는 그런 것들이 잘 없다. 여행도 즐기지 않고, 자녀도 없고, 좋아하는 연예인도 즐기거나 행복할 정도로는 없다. 그냥 큰 행복보다 일상이 힘들지 않기만 바라온 기간이 너무 길기 때문일까.
사실 즐거워하고 즐기는 것을 잘 모른다기보다는 무의식 중에 '즐기는 것'은 나쁜 것이라는 인식이 있어서 즐기지 못하는 것에 가깝다.
20대까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먹는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우울하거나 안 좋은 일도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풀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먹는 것'을 좋아한다고 말하기 애매하다. 살이 찔까, 몸에 좋지 않을까 걱정하며 먹다 보니, 그리고 오른 물가에 가격 걱정도 함께하다 보니, 예전처럼 편안하게 먹는 것을 즐기기가 어렵다.
항상 먹는 것이 아니라 다이어트할 때에도 '길티 플레져(guilty pleasure)'를 즐길 수도 있다. 길티 플레져는 죄책감과 즐거움을 동시에 느낀다는 것이 핵심인데, 어느 순간부터 나에게 먹는 행위는 길티(죄책감)가 플레져(즐거움)를 압도하고 있다. 그러니 요새는 밥 먹는 게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다음으로 내가 꽤 오래 즐기는 것은 '핸드폰 게임'이다. 나는 다양한 게임을 좋아하고 매일 2시간 이상씩은 아는 것 같다. 하지만 이것 역시 '길티'가 '플레져'를 이기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이다. 꾸준히 하고는 있지만, 가끔씩 성장한 캐릭터와 레벨을 보며 현타가 오기도 한다. 내가 이 레벨에 오기까지 많은 시간과 돈을 낭비했다는 죄책감이 밀물처럼 밀려오는 것이다.
물론 게임은 먹는 것보다는 그래도 매일매일 잠깐씩이라도 즐기고 있긴 하지만, 내 취미이고 내가 즐기는 것이라고 자신 있게 소개하기에는 왠지 민망한 느낌도 든다.
사전에서 찾은 즐거움의 의미는 이렇다.
즐기다 [동사]
1. 즐겁게 누리거나 맛보다.
2. 무엇을 좋아하여 자주 하다.
그 자체를 누리는 것. 그리고 좋아하고 자주 하는 것.
좀 특이한 것은 표제어를 설명할 때 활용형을 잘 쓰지 않는데, 여기서는 '즐기다'를 설명하기 위해 '즐겁게'라는 부사어를 썼다는 것이다. 무엇으로 대체해서 표현하기 어려운 '즐기다' 만의 감각이 있기 때문일까.
고전에서 찾아보면 '락'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희로애락(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이다. 글쓰기나 책 읽기의 성취감이나 운동 후의 뿌듯함, 일에서의 성공은 기쁨 같고, 노여움도 꽤 느끼고. 슬픔은 내 인생의 핵심 감정인데... 즐거움. 樂만 왠지 둥둥 떠있다.
유학에서는 사단칠정이라고 하며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는 7가지 감정으로 희노애구애오욕 (기뻐하고, 성내고,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욕심내는 것)의 칠정을 제시한다. '희노애'까지는 똑같은데, 즐거움은 사라지고 두려움, 사랑, 미움, 욕심이 남았다.
'樂'이라는 게 인간의 핵심 감정은 아닌 것인지, 아니면 樂 안에 두려움, 사랑, 미움, 욕심이 겹치는 것인지 궁금해진다.
'樂'에 대해 이리저리 생각해 보다가 내가 다른 감정에 비해서 '즐거움'에만 너무 높은 기준을 요구하고 있는 것인가 생각이 들었다. 화나는 것도, 슬픈 것도, 기쁜 것도 그냥 할 수 있는데, 왜 즐거운 것만 어렵게 느껴지는지..
심플한 정의를 위해 더 원초적인 '樂'의 근원, '쾌락'에 대해 찾아보았다. 그리고 의외로 '쾌락'의 사전적 정의를 통해 나만의 답을 일부 찾을 수 있었다.
'쾌락 [명사] 감성의 만족, 욕망의 충족에서 오는 유쾌하고 즐거운 감정.'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감성의 만족'과 '욕망의 충족'이다. 내가 樂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성취감이나 뿌듯함, 성취감도 감성의 만족이라는 측면에서는 쾌락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욕망의 충족'이라는 정의를 보면, 결국 내 '욕망'을 제대로 바라보아야 충족도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불행하지 않기만을 바라던 삶을 지나, 결국 내가 마주해야 하는 것은 내 감성과 욕망이었다. 감성은 감정이 아니라 자극과 변화를 느끼는 성질이다. 나는 무엇에 자극받고 무엇에 변화하는가. 욕망은 내가 원하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는 즐거움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즐기고 누리는 것. 자주 많이 하는 것. 나를 알아가는 과정 자체가 즐거움이 될 수도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 일상의 단어를 찾고, 글로 풀어나가며 나만의 답을 찾는 과정. 이것 역시 나의 쾌락이고 즐거움이다.
매일 꾸준히 글을 썼다는 성취감. 좋은 글을 읽을 때의 기쁨도 나의 즐거움이다.
맛있는 인절미 한 조각, 입에 딱 맞는 껌 한 개도 즐거움이다.
즐거운 일을 하나씩 늘려가 보는 재미. 그 과정 자체가 즐거움이 되리라고 믿으며 오늘의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