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그림의 단어사전
( ) 떠나다.
빈칸에 들어갈 말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가요? 당연히 정답은 없고 다양한 말이 들어가겠지만, 제일 먼저 떠오르는 말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답으로 떠오르는 것은 여러 가지입니다.
배가, 자동차가, 버스가, 기차가, 내가, 그가, 가족이, 반려동물이...
회사를, 그를, 연인을, 친구를, 집을, 학교를, 세상을, 여행을...
유럽으로, 부산으로, 집으로, 지방으로, 서울로, 세계로,
오늘, 내일, 지금, 내년에, 어린 시절에.....
이 외에 다른 것들을 떠올리셨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제가 떠오르는 것을 모두 나열해 보았습니다.
혹시 4줄로 나눈 것들의 공통점이 느껴지시나요?
잠깐 본업인 국어 선생님으로 돌아가서 유형별로 구분해 보겠습니다.
먼저 첫 번째에 써둔 것들은 모두 '~가'의 형태입니다. 문법적 용어를 쓰다면 주어에 해당하는 것들이고 '누가'에 해당하는 것들이지요.
두 번째에 써둔 것들은 모두 '~를'의 형태입니다. 문법적 용어로 목적어에 해당하는 것들이고, '대상'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아마 이 경우를 떠올리신 경우라면 '~가'에 해당하는 주어를 무엇으로 떠올렸는지도 함께 생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내가 회사를 떠나다'와 '그가 회사를 떠나다'는 완전히 다른 문장이기도 하니까요.
세 번째에 써둔 것은 모두 '~(으)로'의 형태로 문법적 용어로는 부사어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장소를 뜻하지요. 역시 주어가 무엇이냐에 따라 많이 다를 것 같습니다. 떠나고 싶은 마음에서 떠올렸는지, 떠나간 이를 생각하며 떠올렸는지요..
마지막은 형태는 다르지만 모두 시간 부사어에 해당합니다. 시기적인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제 남편에게 물어봤을 때 제일 먼저 나온 게 '지금 떠나다'이기도 했습니다. 남편은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걸까요?
형태로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기보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어떤 이미지이고, 무엇을 연상시키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처음 '떠나다'라는 말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는 '내가 떠나다'와 '나를 떠나다'라는 말이 서술어가 같음에도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었습니다. 앞에 오는 말을 무엇으로 쓰느냐에 따라 능동적으로 떠나가는 느낌인지, 이별을 당한 느낌인지의 뉘앙스가 문자로 쓰인 단어만으로는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거든요. 제게 '떠나다'는 이별을 먼저 떠올리게 하는 단어인데, 누군가에게는 떠나다가 '여행을 떠나다'처럼 자유나 해방을 의미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그 점이 참 신기했습니다.
떠나다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너무 많은 의미가 나오는데요. 크게는 있던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이동', 관계를 끊는 뉘앙스의 '이별',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 위해 길을 나서는 것 등 다양합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는 떠나다의 핵심 키워드는 '변화'입니다. 고정된 무언가에서 이동하고 변화하고 멀어지는 것. 새롭게 나아가는 것이 '떠나다'의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능동적으로 떠나든, 나는 가만히 있었지만 누군가가 나를 두고 떠나가 버리든. 내 삶과 내 안의 무언가가 변화할 테니까요.
결국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 변화를 어떻게 바라보고 받아들이느냐가 아닐까요?
저는 도전하고 변화하고 성장하는 것을 좋아하기에 처음에는 '떠나다'를 능동적으로 해석하자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글을 쓰려고 했습니다. 내가 무언가를 놓치고, 무언가가 나를 두고 떠나갔다기보다는 '여행을' 떠나고, '비행기를 타고' 떠나고, '세상으로' 떠나고, '그를' 떠나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글을 쓰다 보니 누군가가 나를 떠나는 것도 참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더 와닿았습니다. 이별을 당한다고만 생각했는데 제가 지금 만나고 있는 고3 아이들도 졸업을 하면 이제 사회로 떠나갈 것이고, 학교에 계신 선생님들도 다른 학교나 다른 부서로 떠나실 것입니다. 먼 이야기이길 바라지만 저를 비롯한 사랑하는 가족들도 결국에 언젠가 세상을 떠나는 것이 자연의 순리이기도 합니다.
요즘 시대는 능동적으로 움직여서 변화를 만들어내는 것을 요구하고 그것을 매우 좋게 봅니다. 하지만 떠나가는 것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도, 그리고 다 떠나가더라도 무언가를 단단히 지키고 있는 것도. 충분히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모든 변화는 우리에게 성장의 기회를 줍니다. 그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전부 내 몫입니다. 어른이 되면 제일 두려운 것이 '변화'라는 말도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할 수 없는 것이 '변화'이기도 합니다.
자연스럽게 떠나고, 또 자연스럽게 남는. 그런 글. 그런 삶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오늘의 글을 마칩니다.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